facebook에 있던 글 옮김.

2011년 12월 29일 글이지만 2012년 한해동안 읽은 책이 없으므로 

이것으로 동기부여 겸 대체한다.

2013년 독서생활 화이팅



2011년 독서생활 어워드. 한해의 책읽기를 되돌아보자... 올 한해는 상반기에 비해 하반기에는 그닥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던 듯하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닥 대중성 있거나 전문성이 있는 책이라기보단 얕고 안유명한... 취향타는 책만 골라 읽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실은 하반기에 <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나 <정체성 권력> <인간의 조건> <패배를 껴안고> 등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읽었다면 뭔가 뿌듯했을텐데...

...됐고 일단 가보자!

BEST 7

1. 뉴라이트 사용후기 -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 한윤형
- 누구나 구할수 있는 자료로 누구나 할수 있는 얘기를 했지만 , 이 사회에 딱 한권밖에 없는 불가사의한 책. 저자가 나한테 트위터로 한 말이다. 개인적

으로 이런 책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닭치고 정치 같은거 말고.

2.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 이경훈
- 서울은 어째서 도시 자체의 매력을 충분히 뿜어내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가 평소에 부족했다고 생각했던 통념이 실은 과했음을 역발상으로 과감하게 지적하는 멋진 책.

3. 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 <국화와 칼>로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책. 국화와 칼이 구체적인 민족지 느낌이라면 이 책은 자신이 생각하는 문화인류학이 무엇인지 밝히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약간은 모호하게 옳은 것이라고만 남겨두었던 '문화상대주의'의 애매한 부분이 명확해지면서 '문화상대주의'란 어떤 느낌인지 감이 확 왔다. 

4. 한일 내셔널리즘의 해체 / 이건지
- 이 책은 일본어가 원본이다. 즉 지은이는 재일이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한국사회와 일본사회가 보여주는 내셔널리즘이 얼마나 일상적이며,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책. 명쾌한 주장도 주장이지만 사례로 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흥미롭고 유용하다.

5. 가면의 고백 / 미시마 유키오
- 이야 드디어 문학작품이구나? 이 소설은 저자의 자기 고백이다. 그러나 소설이다. 보통은 자기 고백은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다. 그러한 모순을 대놓고 인식하고 지적하듯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때의 빛이 기억난다"고 말하며 시작하는 소설. 표현이나 감성이 상당히 아름답다는 느낌. 이런 소설을 25세에 썼다는 것을 발견한 한 25세 독자의 열폭.

6. 내안의 유인원 / 프란스 드 발
- 침팬지와 보노보를 연구한 동물행동학자의 책이다. 침팬지 폴리틱스 라는 책으로도 유명한 분인데, 이 책은 그 책의 증보판 느낌으로 저자의 연구내용을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많이 위협받을수 있는지(인성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동물성에 가까웠다는 진실을) 밝히는 책. 시야를 넓힌다는 측면에서 인문사회계열 분들이 읽으면 좋을듯 하다.

7. 번역어 성립사정 / 야나부 아키라
- 서구의 개념어를 근대 일본인들이 번역해서 만든 조어 10개의 성립과정을 통해 근대적 개념이 어떻게 의미를 상실하거나 새로운 의미가 더해져 동아시아에서 완성되었는지를 밝히는 책. 사회, 개인, 자연, 존재, 권리, 자유, 연애 등의 조어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단순히 가십거리들의 나열로 볼수도 있지만, 번역어로서의 개념어가 만들어내는 효과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거리를 준다. 

WORST 3

1. 코뮨주의 / 이진경
- 뻐큐머겅ㅗ 두번머겅ㅗ
- 이사람이 원하는 사회란 대놓고 말해서 방사성 원소를 매우 안정적인 비활성 원소로 만들자는 소리다. 역사적으로 특정한 순간에만 일어날수 있는 일을 항구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니까 개소리.

2. 당신들의 대한민국 / 박노자
- 내가 너무 이 책을 늦게 읽었다고 말해줘. 한마디로 말해 논의 자체가 너무 촌스러웠다.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책...

3.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 ....음 그래서 어쩌라고?

2010년도 이런거 할걸 왜 그생각을 못했을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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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글씨+기울인글씨가 선생님 강연 내용 정리한 것. 오로지 분량으로 평가하고 내용은 읽지 않는다 했으므로 통일성을 버리고 최대한 주절거린 느낌이다.


우리가 보통 무소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소유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소유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소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소유함으로써 존재를 확인받는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고 하여 상대적인 개념으로 제시했지만, 나는 소유와 존재는 연결된 하나라고 믿는다. 가장 숭고한 가치라고 하는 종교나 신앙의 문제도 결국 물질이나 소유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의지, 욕망, 집착과 같은 것들이 결국 생(生)의 의미가 아닌가?


우리는 소비가 미덕이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살아가는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존재하기 위하여 소유하는 것일까, 소유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일까? 선생님의 강연 내용은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굳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존재하기 위하여 소유를 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주체적인 인간상이다. 선생님께서 추천하신 도서 <월든>의 저자(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그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 중 하나다. <무소유>의 법정 스님도 무소유라는 원칙을 통해서도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삶은 그렇게 바람직하고 여기고 원하는 방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 새로운 의미를 낳기도 하는 경우도 빈번한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행동들이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거나 나중에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 당시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에 입각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 합리화나 인지 부조화와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소유를 통해 존재하는 인간상도 그와 마찬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그 이유와 의미를 명확하게 다짐하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올 한때 안팎으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을 겪으면서, 상당히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그때 쏘아대듯이 친구에게 내뱉었던 말이, ‘이 세상에 진심이 어디 있어? 다 남들을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뿐이지’ 였다. 어떻게 보면 허세가 다분한 어린 시절의 말인 양 싶고, 내가 한 말이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다’ 충고하고자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은 말이다. 실제로 그런 소리도 들었고.

하지만 또 저 말 자체가 아예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의지와 욕망과 집착 같은 것들이 살아가는 의미를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랑과 헌신의 감정은 어떨까? 물론 그것들까지 남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목적의 행동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아무래도 사랑은 고귀한 것일 테니까. 그렇지만 사랑과 헌신의 감정 또한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결과를 의도하는 행위임에는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살아가는 존재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욕망’을 저변에 깔고 살아간다. 이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우해주는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은 그 대우를 받고 싶은 욕망이 있고, 매니악한 좁고 가파른 길을 걷고자 하는 이도 그러한 고행에 대해 인정해주는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욕망이 있다. 심지어 자신을 타자화하여 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게 현대인이 아닌가?

어느 누가 이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드물게 존재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초월한 사람은 이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닐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동물이거나.

그런 점에서, 어떤 것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잃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은 것을 빠르게 실망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더 이상 어떤 삶의 의미가 있을까? 고난과 역경을 겪으며,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을 배우며 성숙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그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상황에서 갖추어온 성숙과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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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어렸을 적 3년 주기로 들은 말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되면 저학년때와 다를거다. 정신 바짝 차려라”
 
“초등학교때와 중학교때는 다르다.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힘들거야”

“중학교때와 고등학교때는 다르다. 다른 애들 놀 때 네가 많이 해서 잘 한거지, 고등학교때는 전부다 같이 열심히 하거든”
 

 
 
“여기서 넌 언제나 어렵지 않게 일등을 할 수가 있었지. 하지만 신학교에는 모두 능력있고 부지런한 학생들뿐이란다. 그런 아이들을 앞지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닐거야. 내 말 알아듣겠니?”(p.74)
 

 
 
뭐 사실, 살면서 내가 들어야 할 얘기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뭐! 군대를 아직도 안 갔다 왔다고? 언제 가려고? 군대는 일찍 갔다오는게 제일 좋은거야”

“졸업은 언제 하려고? 졸업하면 뭐 할건데?”
 
“야 사회 나와봐라, 학생 때가 좋은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독하게 사는데”
 


 
 
 
 
2.
 
우리 나라엔 왜 이렇게 여기저기에 묻지도 않은 소식에 깨알같이 답해주는 정성스런 조언자들이 많은 것일까? 공교롭게도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도 훌륭한 자질을 갖춘 트레이너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스의 불안감을 타파하기 위해 ‘시험에 떨어진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냐’고 다독이는 목사(p.20), 초콜릿을 먹고싶지 않아하는 한스에게 사랑을 담은 마음으로 먹으라고 재촉하는 숙모(p.28), 혹시 시험을 떨어지면 김나지움에 진학하게 해줄수 있냐고 묻는 한스에게 ‘넌 내가 상공회의소의 고문이라도 되는 줄 아는거니?’ 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아들에게 경제관념을 일깨워주는 아버지의 자상한 호통(p.43). 이런 모든 광경이 경솔하고 짧은 생각을 하는 어린 한스를 바른 청년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주변 어른들의 모습이다.


 
 
이런 풍경은 작품의 후반부까지 일관성있게 나타난다. 술이 과해서 집에 돌아가려는 한스에게 브랜디 한잔을 더 추천하는 숙련공의 모습(p.258). 귀가가 늦는 아들에게 집에서 걱정하는 아버지의 존재를 잊지 않게 하고자 몽둥이를 매만지는 부성애까지. 그리고 ‘같은 시각,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로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p.260)


 
 
단지 조금 생각이 다른, 장례식에 찾아온 신사처럼 차려입은 학교 선생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들도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p.263)이라는 ‘서투른 트레이너’ 구둣방 아저씨의 말은 아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독자들에게만 남길 선언이 되었다.
 


 
 
 
 
3.
 
내가 나보다 어린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원하지도 않는데 조언해주는 건 질색이지만, 대학생이라는 멀지 않은 나이 때문인 것인지, 여기저기서 ‘좋은 얘기’ 좀 해달라는 요청은 많다.(물론 대부분이 부모님/선생님의 요청이지만)
 

 
 
최근에 내가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보습학원에서, 중3을 마치는 아이들과 마지막 수업이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왔던 “고등학교 장난 아니니까 준비 열심히 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넘치도록 많이 할 테니까.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반드시 남겨두고 지켜내라고. 24시간과 365일을 자기 뜻대로 하는 삶은 불가능하겠지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이 더 위험하다고. 자기 자신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은 그런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이 닥친다면, 그때는 지금까지의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20대 사망 원인의 절반이 자살인 한국의 현실과, 스무 살까지 남들보다 계속 잘하기 위한 마음으로만 가득 찬 삶을 살다가 큰 부침을 겪은 나의 경험 때문이라도, 반드시 그 말만은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한스처럼 낚시와 수영을 그리스어와 수학에 빼앗기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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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레, 2006년)
상세보기

<월든> 감상문


 
 
19세기 미국의 한 지식인이 월든이란 이름의 호숫가에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일을 쓴 이야기. 책 겉표지의 제목 위엔 ‘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불멸의 책’이라고 적혀있고, ‘법정 스님이 가장 사랑한 책’이라는 수식어구가 추가되어 있다. 역자는 <월든>의 저자인 소로우가 19세기의 인물이지만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며[각주:1] “아마도 최초의 녹색 서적을 저술한 최초의 환경보호론자이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각주:2]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녹색이나 생태, 환경의 테마로 이 책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되었을 때 단지 생태주의나 문명 비판, 무소유 정신 정도로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여타 다른 종류의 책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그런 내용의 책이 19세기에 쓰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쓰인 책이 21세기의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생태주의의 관점으로만 설명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태와 환경을, 그리고 시대상을 넘어선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려한 글을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거리두기’에 능한지 금세 느낄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시대상의 편견에 함몰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탁월한 관찰력과 직관으로 사람들의 모순을 꼬집어낸다. 아니 꼬집는다기보단 헤집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나 또한 소로우의 비판에서 자유로운 바는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신이 나서 그의 내러티브에 빠져들 때가 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토스타인 베블렌의 저서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할지도. 이런 부분에서 그는 훌륭한 문화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의 소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19세기 미국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마치 눈에 펼쳐지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비합리적인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바로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배경이 되는 시대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미개인’ ‘인디언’ ‘철도’ ‘농장’ ‘노예’ ‘바느질하는 부인들’ 등의 어휘는 이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채소엔 뼈가 될 성분이 없기 때문에, 채소만 먹고는 살수 없다”는 한 농부의 충고 아닌 충고에 소로우가 “그런 농부도 꼬박 풀만 먹고 자란 소가 쟁기를 끌도록 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있다”[각주:3]고 꼬집는 부분은 지금으로선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 그 농부와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는 이는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로우는 19세기 주변 사람들의 생활상과 모순을 비판하고 있는데도 현재 우리에게 그의 비판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그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느끼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역시 그가 어떤 특수한 개별 행위를 놓고 꼬집은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통찰력이 2세기를 넘어서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통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단지 소로우가 시대를 앞선 천재였을 뿐인가? 이 두 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본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며 그 키워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가 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미리 하자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세계시민적 사고'이며,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소로우는 당대에 통용되던 속담에서부터 자연과학적 지식, 성서나 그리스 신화와 철학, 고대 중동의 역사나 로마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승지식은 물론 중국과 인도의 철학까지 풍부하게 인용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의 힌두 경전인<바가바드기타>의 철학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논어는 물론 맹자와 대학까지 인용하는 것은 적잖이 놀라웠다.[각주:4]

 
 
그는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의 고전양서를 구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껏 <아동독본>이나 <리틀 리딩>수준의 이야기책과 최신 가십거리를 다루는 신문을 읽는 데에 그치는 주변 이웃들의 독서 경향을 비판한다.[각주:5]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 민족 말고도 경전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각주:6],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각주:7] 등의 이야기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지혜에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콩코드 교외에 있는 한 고독한 농부의 종교적 체험과 믿음이 수천 년 전에 조로아스터에게도 있었고, 그 농부와 똑같은 길을 걸었고 똑같은 체험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소로우는 조로아스터가 현인(賢人)이어서 그 경험이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콩코드의 농부와는 달리 하나의 종교를 창시할 수 있었다고, 보편성의 자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각주:8] 이미 그는 전 지구적, 전 세계적 수준의 보편성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 연표를 보면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토록 풍부한 동서고금의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외 곳곳을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평생의 대부분을 고향근처에서 지내는 등 미국 땅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대서양에 해저전신을 가설하기를 바랐던 당시의 교통 통신수준[각주:9]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관점을 지녔다는 것은 그의 생애 자체가 현대적이었다는 증거다. 지금과 같은 유비쿼터스 환경이 없었음에도, 미국의 구석에서 평생을 보낸 이가 200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공간을 넘어 지금 한국의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나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알아도 저서를 읽지 않는 것은 플라톤이 옆집에 사는 이웃임에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각주:10]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소로우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소로우가 현대적 감각을 가진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서, 그가 다른 필부들과 달리 자유를 외치고 세계 보편적 사고를 지녔다고 해서, 그를 단순히 독립적인 인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질문 -소로우의 통찰력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이유다. 그는 미국인이며, 미국적 사회 풍토에서 등장한 인물임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로우 자신은 주변 이웃들(미국인)에게 쓴 소리를 퍼부어댔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와 같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존재했으며, 미국은 그러한 지식인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이 현대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원동력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 시대의 미국 사회를 보고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감탄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10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떤가. 1990년대 문민정부에서 세계화와 지구촌을 주창한 이래로,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고 그때에 비해 세계화란 용어는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구촌이란 단어는 이제는 굳이 언급해봐야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세계시민의식은 낙제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사회시간에 문화나 역사 부문에서 세계적(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대비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 우리에게 세계적 보편성의 인식과 존중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세계적 보편성에 함몰되어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게(?) 우리의 고유한 특수성을 주체적으로 지키자고 강조하며 마무리하는데, 조금 쓸데없는 걱정처럼 느껴진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모순과 부조리라 할지라도 ‘현실적’, ‘한국적’ 따위의 수식어로 고수되며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특수성(Local Rule)이 너무나도 강력한 권위를 지녀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어떻게 중․고등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신체(머리카락)를 함부로 억압적으로 규율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떤 교사가 아침에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규율하고 나서 교실에선 아무 거리낌없이 천부인권을 가르친다고 상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2010년 현재까지도 두발규제 논란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논란이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자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최근 저 너머의 국가에서 독재 권력이 3대째 세습되는 것에 대해 ‘내정간섭’이라며 애써 판단을 유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한 정치집단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히틀러가 침략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내정간섭이라며 판단을 유보했을까? 세계사적 보편성의 자각이 있다면, 그렇게 비상식적인 우호와 궤변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가르치자는 따위의 수준 낮은 논란을 수시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세계화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정신(문화)적 과제는 세계 보편성의 인정과 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고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세계를 느끼고 가졌던 한 미국인이, 팝송을 흥얼거리고 외국어를 배우며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닐 수 있지만 세계적 시야로 상상․사고하지 못하는 일군의 한국인들의 사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아닐까.
 
 






  1. H. D. Thoreau, 「월든」, 강승영 옮김, 이레, 2004, p. 479 [본문으로]
  2. 위의 책, p. 481 [본문으로]
  3. 위의 책, p. 19 [본문으로]
  4. 위의 책, p.137, p.315, p.313 [본문으로]
  5. 위의 책, pp. 153-154 [본문으로]
  6. 위의 책, p. 154 [본문으로]
  7. 위의 책, pp. 155-156 [본문으로]
  8. 위의 책, p. 156 [본문으로]
  9. 위의 책, p. 77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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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감상문

2010.11.09 17:30 from 책/감상문

주의 : 만약 당신이 카프카의 소설 <소송>(혹은 심판)을 알지 못한다면 뭔 개소리인가 할수도 있습니다. <소송>을 읽고 오십시오. 그리고 나서 이 글을 보면 조금 다를 겁니다. 그때서야 당신은 '이것은 정말로 개소리구나' 하실수 있습니다.
 
 
카프카 <소송> 감상문
 
 
 
그날따라 딱히 해야 할 과제도 없었고, 1시간 반씩 걸리는 하굣길도 피곤하지 않았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용돈도 조금 남았으니 오랜만에 치킨도 시켜먹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전날 저장해뒀던 게임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탁자를 펼쳐놓고 왼쪽에 노트북 오른쪽에 치킨과 물티슈. 자 이제 놀아볼까 싶을 즈음,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시더니 옆에 앉으시곤 평소답지 않은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물으시는 말씀이,
 
“어웅아,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니?”
 
 
 
...........................결혼?
 
 
 
순간 내 방 전체가 네거티브 필름을 씌운 듯, 머릿속에 이수학점, 누적학기성적, 재수강할 과목 리스트, 책상서랍에 있을 노란 2급 현역병 신체검사표와 국방부 스팸문자, 가장 길게 연애해본 날짜(?), 3년 연속 행정고시 1차에서 고배를 마신 친구의 얼굴(??), 낙성대 부동산 앞을 지나가면서 보았던 원룸 보증금 시세(???) 등이 차례로 흘러 지나갔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고 하니, 어제 동생이 지나가다가 동네 애기를 보더니 너무 귀엽다면서 조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오빠는 언제 결혼하는지 물어보랬다고. 아니, 바바롯사 작전도 아니고 같은 자식의 입장에 있으면서 이렇게 뜬금없이 뒤통수를 치나. 평소에 애들이랑 노는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갑자기 납치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어쨌든 머릿속에서 임의로 신뢰수준 95%의 검정까지 거친 결과(?), 결혼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20대에 존재할 과업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20대엔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알았다” 하고는 쌩 나가신다. 뭐야 ‘아님말구’ 식의 질문이었던 건가.
 
 
 
 
 
그날 부로 그때까지 누려왔던 무한한 여유의 생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은 평화로운 청춘의 시간은 끝이 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그 체포의 순간이, 하루빨리 자립을 이루어 내야겠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서는 살수 없게 만들었다.
 
 
 
일단은 보류를 시켰지만, 언제 갑자기 이런 질문이 다시 나를 찾아올지는 알수가 없다. 아마 5년 정도 뒤엔 훨씬 자주 심리가 열리겠지. 그때쯤에는 어쩌면 매주 집안에서 심리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까진 꾸준히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요지의 청원서를 변호사도 없이 홀로 작성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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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감상문

2010.10.09 17:30 from 책/감상문

  
언젠가 문득 이런 생각이 찾아오는 날이 있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사람은 무엇에서든지 이유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지금까진 진지하게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의문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졌을 때,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꼈을 바로 그 때, 우리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찾아온 것이고 우리는 각자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한테나 적용되는 절대적인 삶의 목표라는 것은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삶의 목표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기능적으로 낫겠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열심히 공부하려는 학생이 그 목적을 묻는 스승과의 끊임없는 문답을 하다 보니 결국은 죽기 위해 공부한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파우스트의 말처럼 “우리 인생은 채색된 영상에서 파악될 뿐”(4727)인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실은 우리 주변에는 ‘삶의 의미’를 주제로 삼는 이야기들이 이미 적지 않다. 우리는 이미 제공되는 ‘잘 다듬어진’ 삶의 가치관과 규범을 몇 개 골라 선택할 수도 있다. 경제적 부, 명예, 종교적 가치와 관련된 수많은 격언과 규칙들이 서점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되어 있다. 그런 것들은 인터넷에도 많이 있다. ‘효율적인 삶’을 돕는 이런 지혜와 격언의 언어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수행할 것을 제시한다.
 
 
 
따라서 어떤 규범을 선택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의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의 문제에 모든 것이 달려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규범의 언어에 자신을 맞춘 삶은 평탄하고, 잘 맞아들어갈수록 행복감을 느끼겠지만 결국은 그 근본은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일조차 죄송스러워질만큼 주어진 규범에 충실하게 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삶을 피하고자 하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Struggle, 진력(盡力)과 같은 단어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삶은 끝없이 부딪히고 넘어서는 어떤 지리한 투쟁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다. 때문에 단순히 규범의 기계적 수용을 기초로 한 행복한(쾌락의) 삶은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쌀눈을 떼어낸 백미가 맛이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 건강을 위협할 수 있듯이.

 
 
물론 부딪쳐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있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가 철학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천재가 아닌 범인(凡人)인 이상, 직접 부딪치지 않고서야 얻기 힘든 중요한 가치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 우리 사회는 그런 가치의 존재나 필요성에 대해 무감각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을 때 파우스트처럼 되려고 찾아온 학생은, 후에 학사가 되어 메피스토펠레스와 재회한다.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재미있게도 이때 파우스트는 학사와 마주하지 못한다. 만약 “경험은 물거품과 같은 것”(6758)이라 말하는 학사의 말을 파우스트가 직접 들었다면 파우스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예전에 한 친구가 내게 '너는 전신전령(혹은 전심전력)을 다해 살아가는, 약간은 무모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그런 것 같다.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자,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7488)는 만토의 말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다가온 것은 그 때문일까. 정말로 나는 '쉽고 편안한 길의 발견'을 인생의 제일 목표로 살아가는 듯한,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보다도 불편해 하는 것 같다.

 
 
앞서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이 허무한 것임을 알았을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고민할 때 각자의 파우스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인생은 원래 허무한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노력하는 것. 때로 도망치고 피하는 것이 편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길은 아님을 알고 경계하는 것. 나의 <파우스트> 이야기의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부딪치고 방황해야 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317)이라는 구절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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