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생애

2010.07.17 07:18 from 책/발췌

 

 

 



예수의 생애

저자
엔도 슈사쿠 지음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 2003-09-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예수가 걸어간 인생의 길을 폭넓은 신학적 지식과 깊은 신앙, 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가톨릭출판사


 
p.58-60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창녀는 막달라나 그 부근에 사는 가난한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겼고, 남자들은 그녀를 경멸하면서 돈을 건넸을 것이다.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그녀는 어둠 속에 공허한 눈길을 던진 채 꼼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예수가 식사를 하는 집이 바리사이파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도 집안에 들어갈 때 하인들로부터 제지당했을 것이다.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창녀 같은 사람은 말을 거는 것조차 피해야 하는 천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구약의 세계에서 그녀들은 종종 예언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하인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들어간 자신을 놀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예수 앞까지 곧장 걸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눈물로써 자신의 애처로운 처지를 호소했다.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라는 간결한 표현 속에서 그녀의 비참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이때 한 말은 성서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이다. “이 여자는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이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랑을 베푼 사람은 많이 용서받는다…
 

 
 
p.62
 
‘위로 이야기’가 ‘기적 이야기’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적 이야기’가 갈릴래아 지방에 남아있던 예수의 전승을 모아 쓴 것인데 반해, ‘위로 이야기’는 아마도 목격자인 제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위로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애환을 못본체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사막의 예언자들은 고고한 자세로 훌륭한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는 갈릴래아의 빈곤한 마을의 불구자나 병자와 함께하며 창녀나 세리처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이들도 위로했다. 호숫가의 마을들은 보잘것없고 비참했지만 예수에게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의 모든 사람의 애환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처럼 사람들의 애환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위로 이야기’가 지닌 사실성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때 그는 또 하나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사랑의 무력함이 그것이다. 그는 불행한 이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사랑의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배반할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인간은 결국 효과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은 치유되기를, 절름발이는 걷게 되기를, 맹인은 볼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현실세계에서의 효과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행위이다. 여기에 예수의 고뇌가 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라고 그때 그는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 이야기’의 배후에는 이러한 에수의 고뇌가 숨어 있다. ‘기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행했는가 하는 통속적인 의문보다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결국은 사랑이 아니라 징표와 기적밖에 구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하였는지를…
 
 

p.124
 
가정적인 언니 마르타에 비해 적극적인 성격인 마리아는 갑자기 값비싼 나르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꺼내 아낌없이 예수의 발에 부었다. 그녀의 이 행동은 예수를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녀는 당시 집을 에워싸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메시아시여!”라고 외치는 순례자들의 열띤 함성에 맞추어 행동했던 것이다. 확실히 메시아라는 말에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자들은 마리아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아마 감동했을 것이다. 스승이 이렇게까지 환대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다 이스가리옷이 입을 열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차고, 사람들이 감동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유다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경멸하는 듯한 말투이다. 그 혼자 제정신인 듯했다. 유다는 물론 마리아가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것을 유다의 위선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말에는 한층 깊은 의미가 있다. 예수는 모두가 요구하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유다는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아직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때, 유사 이스가리옷만이 스승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분심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이때 예수에게 반발한 것이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이 말에는 현실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심리가 드러나 있다. 즉, ‘스승이여, 당신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은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당신은 비참한 이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고자 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당장 삼백 데나리온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 유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
 
 


 
p.147
 
…먼저 이 최후의 만찬의 상황을 재현시켜 보자. 집안에서는 식탁을 중심으로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않아 있고, 집 밖에는 예수에게 기대를 건 군중이 기다리고 있다. …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이때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시고…”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에게 지상적 메시아의 꿈을 품고 있던 제자들은 일이 잘 되었을 경우에 누가 예수의 뒤를 이을 공로자인지를 서로 겨루었던 것이다.
 
… 이때 유다 이스가리옷은 군중을 대표해서 예수에게 반발했을 것이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을 볼때는 하느님의 침묵이나 분노밖에 느낄수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사랑보다도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찾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유다의 심리는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반발로 스승의 굳은 결의를 바꿀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꾸짖기 위해서, 이제까지 스승을 따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예수는 유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일을 어서 하여라”
 
이 말은 증오에 찬 말이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의 고통도 알고 있었다. 그는 비참한 처지의 괴로워하는 모든 이의 동반자가 되고자 했는데, 그 가운데는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p.158
 
유다 이스가리옷은 예수를 에워싼 성전 경비원들과 가야파 관저로 돌아왔다. 그는 아마 관저에서 열린 예수 재판에 증인으로서 입회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서를 보면, 유다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라며 은전 서른닢을 되돌려주려고 했다고 쓰여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가 사형에 처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가, 아니면 자신은 예수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게쎄마니로 경비원들을 안내하겠다고 했는데 가야파가 그 약속을 깼던가 둘중 하나이다.
 
그는 돈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가 매맞고 피흘리는 모습을 보자 그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미움, 자기변명, 자기혐오 등의 감정을 맛보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형으로 판결되자, 그는 자신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것이다. 지금 예수가 맛보는 것을 자신은 영원히 맛보아야 한다. 그 불가사의한 상관관계를 유다는 이때 깨달았을 것이다.
 
그때 그는 분명히 예수의 존재 의미를 깨달았다. 복음서는 유다를 배신자, 불신앙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예수를 믿었다고 확신한다. 유다는 가야파에게 돈을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가야파는 이를 냉정하게 거부했다. 그는 은전 서른닢을 가야파 관저의 뜰에 내던지고, 성밖으로 나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 예수는 유다도 구원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와 자신의 상관관계를 느낌으로써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자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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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웅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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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25 03:50

    신곡에서는 아예 유다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문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던데, 나는 기독교에서 왜 이렇게 가룟유다가 폄하되는지 모르겠어. 유다가 만일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만찬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구원도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호와가 전지전능하다면, 유다의 배반이라는 인과관계도 직접 조종한 것 아닌가? 다시말해 유다의 배반도 결국 신에게 책임이 있는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네. 만일 유다가 지옥에 있다면 십자가 보혈의 영광은 전부 신이 가져가고 애꿏은 유다만 신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 쓰게 된건데... 얼마나 삼위일체론이 기교적이고 허구적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됨...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25 03:55 신고

      그런 점에서 저 책 158쪽의 내용은 참 현명하다고 느끼는 이야기야. 나는 유다도 예수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함.

      최근 미국의 한 목사가 예수/기독교 없이 가능한 구원을 이야기했지. 랍 벨 <사랑이 이긴다> 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