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내가 가졌던 답답함과 분노는 내가 보는 간단하고 단일한 세계관에 상대방이 조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아함에서 나왔다. 나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내 생각을 다른 이들이 바로바로 캐치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했고, 바보같이 돌아가는 어른들의 세상을 비웃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좀더 따져보며 생각해보고 고민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러개가 존재할수 있음을 '진심으로' 알아갔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통할 수 있는 두 사람이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하면 서로의 다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게 되었다. 나의 변화에 따른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고 나는 최소한의 상식적인 그 누구와도 이해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였다.

그것만을 목표로 하고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물리적인 내 체력과 정신적인 기력이 내 허영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생체시계가 느리게 돌아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믿고 가고자 하는 길은 어렵고 고되었다. 때로는 (그것이 옳은가 논리적인가 편견없이 합리적인가의 여부와 관계없는, 그것으로 설명하기 힘든) 나의 선호와 취향을 명확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더 효율적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이들과 한 줌의 공감을 하기보다는 혹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보다는, 바보같고 위험한 생각이라도 이유없이 공감하고 통할 수 있는 한두사람을 찾고자 하는게 더 나은 길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애써 얻고자 했던 노력의 길을 포기하고 도피하면서, 허약해진 직관과 희미해진 기억에 의존하며 나는 어른, 아니 꼰대가 되어간다. 군대에 와서 그렇게 됨을 느낀다. 아무런 정신적 자양분없이 밑바닥까지 벌거벗겨진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은 나를 급속도로 늙게 만들었다.

얼핏 보면 소통을 거부하는 측면에서 지금의 나에 대한 설명은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도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과 완전히 같을 수도 있다 생각했던 청소년기, 접점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던 대학생 때와 달리 아마 끝내는 그럴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도피하는 지금의 것은 질이 다르다.

그렇게 나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누군가 이런 바보같은 생각에 동의하고 맞장구쳐 주기를 기대하면서 사회성을 획득했다고, 소울메이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게 될까. 모르겠다 더 생각해봐야 할것 같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다.
Posted by 어웅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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