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패륜의 투쟁

2013. 12. 31. 23:36 from 내 글/중문

http://m.news.nate.com/view/20131231n12236?sect=sisa&list=rank&cate=interest



2013년 마지막날까지 좀 평화롭고 즐거운 내용이 아닌 갑갑하고 빡친 글로 마무리하는것이 짜증날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써보자....



애초에 훈계를 한것이 이상하다 느껴져야 정상이다. 자,

1.버스정류장에서 길빵하는 40대 아저씨에게 담배 끌것을 요구하다 폭행당함 

2.길을 지나가다 안쪽골목에서 담배피는 학생을 보고 훈계하다 폭행당함 

어느게 더 문제인가? 


나는 1번이 더 부당하게 맞은 경우라고 본다. 근데 여론은 그게 아니라는거지. 저 아저씨가 맞을 짓을 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저씨는 이상한 짓을 한거고, 폭행을 당한 것이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라 일어날수 있는 막장상황 중 하나일 뿐이다.


왜 훈계를 하는게 이상하냐고? 이상하지, 미성년 흡연이 법에 걸리는 거면 그냥 신고하면 되지 훈계를 하는게 이상하다. 평소에도 맞는 말이라 생각하면 아무데서나 남한테 하는 사람이고 그게 정의고 자기가 용기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내가 직장에서 젊은이들 부당한 대우 받을때 그렇게 하는 아저씨를 본적이 없으니 그건 아닐것 같다. 


위에 예를 들었듯이 1번 케이스보다 2번 케이스가 '당연히'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회라면, 결국 도덕을 빙자하여 자기 눈꼴시려우면 참견해도 된다는 관습이 널리 퍼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함께 간다. 동방예의지국이 그렇게 그리우시다면, 연장자의 훈계에 머리를 조아리며 설상 욕을 쳐먹고 매질을 당해도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면서 뉘우칠 그림을 원한다면, 집안에서 가장이 기침한번해도 가족들이 눈치를 보며 덜덜 떠는 그런 그림도 수긍할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정말 개인의 자유를 원한다면, 오지랖 없음을 원한다면 애새끼가 아저씨가 뭔 참견이냐며 패는 이런 사건이 생길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그 폐해를 줄일 생각을 해야한다.


신채호가 말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을 빌리자면 이건 천인공노할 일이 아니라 그저 '꼰대와 패륜의 투쟁'의 결과일 뿐이다. 진짜 천인공노할 일은 여기 달린 댓글에 있다. 뭐 삼청교육대가 어쩌고 어째?



+) 기사 후반부를 보면 알겠지만 폭행 가해자측 학생이 개쓰레기가 맞다. 하지만 기사의 제목이 집중하는 부분과 대중이 분노를 일으키는 초점은 '애새끼들이 훈계한 어른에게 감히 집단폭행?'에 있다. 과연 이러한 의식이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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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마트폰 사용도 늦게 한 편이지만(아이폰4s 직전이 롤리팝1) 카카오톡이란것도 그닥 좋아하질 않았다.근데 난 원래 전화보단 문자를 압도적으로 좋아했을 정도로 문자광이었다. 중3때부터 노룩 한손으로 문자질 스킬이 극에 달해 디스플레이 구현속도가 내 타자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버튼 조작을 다 끝내놓고 가만히 보면 마지막 문장이 타자기처럼 척척 써지고 알아서 전송확인 메시지(이 메시지를 보낸 편지함에 저장합니까가) 뜨고 알아서 아니오로 간 뒤 지정된 번호로 전송되는걸 여유있게 확인할수 있었을 정도로. 아무튼 sms/mms에 비해 카톡은 괜히 싫었다. 왜지? 컴퓨터로는 신나게 msn을 갈겨대어 몇백 기가의 대화내용을 하드에 남겨놨던 내가 왜 카톡은 싫지? 그건 상대방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려주는 '망할 숫자' 때문이다.

그 숫자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여유를 앗아갔다. 전화가 싫은 이유는 할말이 없으면 생기는 그 침묵이 싫었기 때문이고, 그 침묵을 없애기 위해 아무말이나 하는 내가 싫었기 때문이다.

문자는, 한번 툭 건드리고, 생각할 시간을 주고, 적절한 대답이 생각나면 툭 건드리며 톡톡 튀는 느낌을 줄수가 있었고, 임기응변이 약한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근데 요즘은 읽씹이라고, 상대가 읽었는데도 답장을 안하면 그게 그렇게 화가 난다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대면으로 대화를 하거나, 전화로 대화를 하는데 내가 말을 했는데도 무시당한것 같다는 느낌을 카톡에서 받는 모양이다.

나는 이해가 안된다. 그 사람이 마땅히 답할 내용이 즉시 생각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뭐라 보내지 하다가 잊어버릴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카카오톡이라는 것은 sms보다 훨씬 1:1관계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스마트폰도 그러하다. 이것저것 멀티태스킹을 하다보면 정신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읽씹에 집착할 정도로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반대로 짜증이 난다. 상대방이 내 존재를 새발의 피로도 보지 않은것 같아 화가 난다고? 모든 이들이 사용하는 어플 가지고 몇마디 던져놓은 걸로 얼굴 마주보거나 전화통화를 하는 수준의 대화시도를 했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문자로 고백하거나 헤어짐 통보를 하는 것이 최악이라는 것은 알면서, 고작 카톡 보낸거 씹혔다고 그리 화를 내는 당신을 보면서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타인과의 교류에서의 진지함의 무게'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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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고숑 2013.12.09 19:54 신고

    공감.. ㅋㅋ 폰 없던 예전에는 정말 어떻게 살았나 몰라~ 응사에서 삐삐치고 설레면서 공중전화에서 전화하는 게 정말 부럽더라고 ㅋ 하지만 주인장님이나 나나 여친한테 잘해주지는 못할 못난 남자일 것 같네요..

  2.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K.Greb 2014.02.10 01:52

    동감입니다 ^^

  3. addr | edit/del | reply 2014.02.12 03:40

    글세요 읽씹에서 화나는부분은 질문에 대한 답이없을때가 많으니까요

  4.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우유 2014.05.08 23:11

    잘읽고갑니다
    좋은내용인것같습니다

  5.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몬스타 2015.09.03 20:54

    읽씹당해서 기분나빴는데 읽고나니 좀 나아지네요. 그러고보면 나도 본의 아니게 많이 읽씹하는듯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딱히 정당한이유가 없다면,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도 딱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 하나하나 따지고 들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피할수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슬픈 일이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서로의 가치를 지킨 것이다. 무엇이 옳은 상황이라든지 옳지 않은 상황이란 없다. 납득이 되는 상황과 안되는 상황이 있을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불특정 다수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존재를 내가 안다고 해서 그 자체가 슬프거나 잘못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게 내가 그를 대했다면 그것은 어느 누가 잘못하거나 문제인상황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대해놓고 저사람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17세 소년 소녀와 별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런 심보가 너무 많다. 대차게 괴롭혀놓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것이라며 내가 너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며 술자리를 빌어 청년들에게 강변하는 아저씨들을 보자면 굉장한 위화감이 든다.

미움받을만한 행동을 내가 하고있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면, 그것을 감수하고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미움받지 않으면 그 사람이 그릇이 크고 고마운것이지, 미움을 받는다고 그사람에게 서운해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서운하다고 말하는 그 심보가 고약하다는 것이다.

병장 말년에 욕쳐먹을거 각오하고 자기 책임 안지고 배를 쨌으면, 욕먹을 것은 예정된 것이라 여기고 배를 째면 된다. 근데 정작 자기가 욕을 먹으면, 인정못하고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에서 얘기한 술자리의 아저씨도, 자리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수밖에 없었으면 청년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자리가 그렇게 만든거라고 납득하면 그만이다. 근데 자기는 너와 잘 지내고 싶었다며 저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나는 이해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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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에 레포트로 제출한 글이다. 그당시에 심취했던 글쓰기 방식이나 글쓰기 습관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재미있다. 일반적인 레포트에 맞지 않는 문체지만 '편하고 쉬운 글쓰기'에 집착했었던 시기라 일부러 이 문체를 고집했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자영업의 완전경쟁시장적 요소들 


1. 문제제기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지난해 3박 4일로 일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경험, 도쿄를 며칠 돌아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약간은 엉뚱하게도 식당이 늦은 오후에 잠시 문을 닫는다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김밥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요시노야'같은 덮밥체인이나 '맥도날드'를 비롯한 패스트푸드점은 24시간 영업을 했지만, 그 외에 일반적인 식당들은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에 준비시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11시부터 3시, 그리고 5시부터 8시까지 영업하는 식이었습니다. 한국의 식당들이 얼마나 힘들게 영업하고 있는지 비교하며 느끼면서, 일본의 식당들에 비해 그다지 벌이가 좋아보이지도 않았다는 점이 계속 걸렸습니다.


보통 고등학교 경제에서 시장의 종류를 가르칠 때, 완전경쟁시장의 예로는 증권거래소나 용산전자상가를 듭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영세자영업의 대부분이 완전경쟁시장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요식업(식당업)을 비롯한 점포사업이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때문에 완전경쟁시장의 개념이 얼마나 현실에서 관찰되고 부합되는지를 다루면서 그 효과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2. 완전경쟁시장의 조건


완전경쟁시장의 가장 대표적인 조건으로 수많은 공급자와 수요자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자영업은 그 경쟁이 치열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택시 대당 인구수는 서울 143명, 도쿄 230명, 런던 345명, 뉴욕 657명으로, 음식점 업소당 인구수(2004년)는 한국 79명, 일본 140명, 미국 416명으로 우리나라 자영업자가 현저히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블록마다 이동통신 대리점이 보이는 것이나, 고만고만한 음식점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는 풍경이 편견이 아닌 객관적인 상황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완전경쟁시장의 다음 조건은 제품의 동질성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한국의 음식점 사업을 경험적으로 떠올려보면 무리 없이 적용이 가능합니다. 가 분식점의 라면(우동)과 나 분식점의 라면(우동), A반점의 짜장면과 B반점의 짜장면, 분식집에서 파는 물냉면과 삼겹살집에서 파는 물냉면, 청진동해장국 체인의 선지국과 양평해장국의 선지국, 서초구에서 파는 3개 천 원 하는 붕어빵과 관악구에서 파는 4개 천 원 하는 붕어빵, 심지어는 바로 옆에 늘어서 있는 노점상의 어묵들도 그 맛의 차이를 쉽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자원의 완전한 이동성, 자유로운 시장의 진입과 탈퇴 여부입니다.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요건이나 진입장벽이 높지 않거나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현재의 상황에 대입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은퇴하고 나면 퇴직금으로 장사나 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인(노하우)의 진입장벽이 거의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3. 완전경쟁시장의 특징


그렇다면 다른 시장(독점적 경쟁시장, 과점시장, 독점시장)과 차별되게 두드러지는 완전경쟁시장의 특징은 어떤 것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실제로 한국의 자영업 시장에서 나타나는 지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완전경쟁시장에서는 공급자는 낮은 가격지배력을 가지게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완전경쟁시장의 조건 중 수많은 공급자와 동질적인 제품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공급자 입장에서 가격지배력을 가지려면 제품차별화 등으로 가격 이외의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데 동질적인 제품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쉽사리 가격을 올리지 못합니다. 실제로 가격을 올리더라도 물가상승으로 인한 제품원가의 상승 또는 인건비 등의 비용 상승으로 인해 할 수 없이 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공급자가 가격지배력을 가지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공급자는 가격결정력이 없고 제품가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결정됩니다.


둘째로는 낮은 진입장벽입니다. 앞서 완전경쟁시장의 조건 중 세 번째로 언급한 시장의 자유로운 진입/탈퇴와 관련된 특징입니다. 실제로 어떤 노하우나 기술, 독창적인 맛을 공급자도 수요자도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좀 더 싼 가격과 많은 양, 혹은 접근성(이른바 목 좋은 곳)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4. 완전경쟁시장의 효과(결과)


이러한 완전경쟁시장이 형성될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몇 가지 이론적 측면과 실제 현상을 비교하면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먼저 완전경쟁시장이 지속될 경우 단기적으로는 생산자가 이윤을 얻을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생산자가 이윤을 얻을 수 없다는 장기무이윤가설이 있습니다. 완전경쟁시장에서의 장기적 균형은 소비자입장에서는 MB(소비의 편익)=P(상품가격), 생산자입장에서는 MR(제품을 1단위 추가생산할때의 수익)=MC(제품을 1단위 추가생산할때의 비용)입니다. 이것을 시장 전체 차원에서 종합하면 MB=P=MR=MC이므로 P(MR)=MC, 즉 장기적으로 생산자는 제품생산의 수익과 비용이 일치하는 가격에서 제품을 공급하게 되므로 무이윤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윤이라는 것은 단순한 매출과 원가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 기회비용을 추가한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이윤이 없다는 것은 현상유지는 가능할 정도의 사업으로 자본 축적은 불가능함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겨우겨우 벌어 먹으며 가게를 유지할 정도의 사업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생산자가 벌어들인 생산자 잉여가 실질적으로는 제품의 생산자가 아닌 요소공급자(토지나 자본을 공급하는 자)에게 넘어가는 효과입니다. 완전경쟁시장이라 할지라도 단기간에는 이윤창출이 가능한데 그것은 생산자의 능력(효율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데도 어떤 생산자는 더 효율적으로(낮은 가격으로) 생산이 가능하여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경쟁시장에선 시장으로의 진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때문에 단기적으로 이윤을 얻는 산업부문에서는 후발주자들의 잇따른 진입으로 보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때 치열한 경쟁 및 요소(토지 및 상가공간, 설비)의 수요증가로 인한 비용 상승(임대료 상승)으로 결국 단기적으로는 이윤을 얻던 생산자도 장기적으로는 무이윤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단기적으로 존재했던 이윤(생산자 잉여)은 상승한 지대(임대료)로 요소공급자에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는 실제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모씨가 A음식에 대해 탁월한 가격경쟁력 또는 양질의 맛으로 성공(이윤창출에 성공)했다고 가정하면 곧 맛집이나 창업성공사례를 다투는 TV프로그램에 소개됩니다. 이때 김씨가 체인점을 모집할 경우 뒤늦게 뛰어든 후발주자(체인점) 이씨는 김씨와 달리 본사에 지불하는 로열티로 인해 추가비용이 발생하고, 본사에 못 미치는 기술수준으로 인해 효율성도 떨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생산자잉여는 요소공급자(설비와 노하우를 전수한 본사 김씨와 상가건물 임대해준 건물주 최씨)에 귀속되게 됩니다.


또는 김씨가 프랜차이즈를 시작하지 않아도 'A음식장사가 요새 잘나간다'는 소문이 돌고 너도나도 A음식점 업종을 변경하게 됩니다. 박씨와 정씨 등 후발주자들의 출혈경쟁으로 인해 결국 김씨를 포함한 대부분의 A음식점들은 무이윤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역시 이윤의 대부분은 요소공급자(점포 임대인)에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5. 맺는 글


최근 고용 없는 성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너무 많은 이들이 점포 형식의 자영업에 종사하게 됩니다. 이들이 특별한 기술경쟁력없이 가격경쟁력으로만 승부하다보니, 정작 노동한 사람은 마땅한 이윤을 얻지 못하고 부동산 임대인에게 그 소산이 고스란히 넘어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자영업자들이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원인을 한 개인의 게으름이나 무능함으로 돌리기는 힘듭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제 혜택이나 창업 지원금 같은 일시적인 대책보다는, 구조적 차원에서 완전경쟁적 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 금전적 지원이 아닌 제품(서비스)의 다양화, 차별화가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사업체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서 민생 관련 공약을 제시하거나 정책을 시행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영업자들이 고용이 이루어진다면 임금노동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 또한 적은 고용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따라서 고용문제와 자영업, 두 영역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최고수준의 노동시간을 통해 성장한 기업들이 더 이상의 새로운 고용창출에는 무관심한 현실, 자영업자보다는 부동산 임대업자들이 돈을 버는 현실에서 순수한 노동의 가치는 유명무실하고 더 이상 정당한 수단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자조적인 인식, 전사회적 아노미 현상이 확산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회 구조를 이루는 공정한 규칙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문헌

- 「있는 그대로, 대한민국」대통령비서실 편저, 2007

- 「미시경제학」이준구, 법문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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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알레듀오 2012.12.08 09:15

    에세이의 향이 살짝 풍기는 레포트???

  2. addr | edit/del | reply , 2016.10.09 03:28

    글 담아갈게요!!



청소년기에 내가 가졌던 답답함과 분노는 내가 보는 간단하고 단일한 세계관에 상대방이 조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아함에서 나왔다. 나는 '너무나도 상식적인' 내 생각을 다른 이들이 바로바로 캐치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했고, 바보같이 돌아가는 어른들의 세상을 비웃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좀더 따져보며 생각해보고 고민하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러개가 존재할수 있음을 '진심으로' 알아갔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통할 수 있는 두 사람이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하면 서로의 다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게 되었다. 나의 변화에 따른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고 나는 최소한의 상식적인 그 누구와도 이해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러나 문제는 속도였다.

그것만을 목표로 하고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물리적인 내 체력과 정신적인 기력이 내 허영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생체시계가 느리게 돌아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믿고 가고자 하는 길은 어렵고 고되었다. 때로는 (그것이 옳은가 논리적인가 편견없이 합리적인가의 여부와 관계없는, 그것으로 설명하기 힘든) 나의 선호와 취향을 명확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더 효율적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이들과 한 줌의 공감을 하기보다는 혹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기보다는, 바보같고 위험한 생각이라도 이유없이 공감하고 통할 수 있는 한두사람을 찾고자 하는게 더 나은 길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애써 얻고자 했던 노력의 길을 포기하고 도피하면서, 허약해진 직관과 희미해진 기억에 의존하며 나는 어른, 아니 꼰대가 되어간다. 군대에 와서 그렇게 됨을 느낀다. 아무런 정신적 자양분없이 밑바닥까지 벌거벗겨진 자신을 바라보는 경험은 나를 급속도로 늙게 만들었다.

얼핏 보면 소통을 거부하는 측면에서 지금의 나에 대한 설명은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도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과 완전히 같을 수도 있다 생각했던 청소년기, 접점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던 대학생 때와 달리 아마 끝내는 그럴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도피하는 지금의 것은 질이 다르다.

그렇게 나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누군가 이런 바보같은 생각에 동의하고 맞장구쳐 주기를 기대하면서 사회성을 획득했다고, 소울메이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게 될까. 모르겠다 더 생각해봐야 할것 같다.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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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소고

2011. 11. 30. 13:12 from 내 글/중문


이세상이 확신과 선명함으로 가득찬 적이 있었지. 그때의 나는 겁날 것도 없었고 아쉬운 것도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루고야 말았고, 또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판별할수 있는 머리도 있었다. 적어도 미성년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신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서 어머니는 좋아하셨을 것 같은데... 적당한 성당을 찾지 못한 내게 그런 주제만 떠오르고 그런 생각에 집중할만한 공간이 거기밖에 없더라. 근 두세달 가까이를 혼자만의 고민에 집중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했다. 휴학하고 22살 23살때 내내 그 고민을 했던것 같다.



적어도 이제는 회의주의가 속성이 된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말도 늘고 글도 늘고 무엇보다 내 생각이라는 게 늘었다. 지금으로선 잘한 결정(전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또 어떻게 ...내가 변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자의식보다 높았던 자존감은 곤두박질 쳤고... 성적은 떨어지고 뚜렷하게 이루어낸 성취는 희미해졌다. 스트레스 속에서 병적인 자의식과잉만 나타나고 있는 상태인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을 겪은 이후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더 인간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 물론 20대가 꺾이고 있는 지금은 그냥 멘탈병신.

이기는 싸움만 한다는것. 내 나와바리에선 내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것.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모른다고 미리 확언하는것. 이것이 나는 솔직함이고 겸손함이고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사실 오만이다. 저만치 밀어내는 것만 하는 것이 소통일 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을 반드시 다 귀기울여 들어줘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한번도 남의 이야기를 '완전한 남의 이야기'로서 듣고자 하지 않았던 나는 이런 노력조차 평생 처음 겪는 고민이었으니까.


과거의 내 모습은 타인과 다를 바 없다. 전에도 글에 썼던 적이 있지만 이전에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아무 연습없이 실행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착각이다. 성인이 되기 전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시도해서 그것을 거의 모두 이루어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허영만 커져서 이것도 신경쓰고 싶고 저것도 신경쓰고 싶다. 이루어낸 것은 막상 별로 없다. 성취와 자신감을 갈구하며 이전의 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애를 쓰는 시늉만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군대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신성한 나의 세계의 벽을 의심하고 허무는 데에만 열중했지만, 어차피 나는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감성적인 인물은 못 된다. 따뜻한 사람보다는 내가 더 소질에 맞고 잘 할수 있는 곳에 역량을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소한의 사회화에 성공한 싸이코패스의 비오는 날의 잡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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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에 대하여

2011. 11. 6. 18:50 from 내 글/중문


 

평소에 여기저기에 '나는 꼼수다' 까는 이야기를 흘려왔기 때문에 내가 그런 입장이라는 것을 주변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다. (내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는 분이든 상관없이 알고 계시다)

fulton이 주로 김어준씨를 어택했다면, 나는 김용민씨를 어택해왔다. (정봉주씨에 대해서는 노무현 열혈 지지자들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그에게 해당할 수 있으니 넘어가자. 남자인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잘생겼다. 참고로 주진우 기자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의 기자활동에 대해서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입장이다.) 

이번 글은 김용민씨에 대한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지금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그에 대한 추가정보도 없을 것 같고, 더이상 이 소재 이야기는 나도 하고 싶지 않다. 진절머리난다. 그 이유중 하나의 힌트는 이 글에도 담겨 있다.


-

김용민은 알다시피 2009년에 20대들이 정신 못차리고 자기 먹고 살길만 찾는다며 '20대 니들은 답이없다'는 요지의 20대 강아지론을 담은 글을 충남대신문에 기고했다. http://press.cnu.ac.kr/news/?news/view/id=5512 

(적지 않은 분들이 이제와서 이게 화제가 된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이 주장은 당시에도 꽤 화제가 되어서 대학생인 내가 강의실에서 교수가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들었을 정도다. 그게 김용민이라는 사람이 말한것임을 몰랐던게지. 주장의 내용이나 20대 개새끼론이라는 명칭은 이미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다.)

(사실 조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촛불시위 당시 20대들의 참여율이 높았다는 단순한 사실지적에서 논리적으로 더 파고 들것도 없이 이사람은 20대는 답이 없고 10대가 희망이라는 개소리를 했는데, 2002년 효순이 미선이때 나온 촛불소녀들은 지금 몇살인데? 그때 다 액체질소로 냉동되었나보지?)

그리고 이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돌연 그는 자신이 잘못생각했고 20대를 오해했다며 2010년 12월에 사과문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다. 마무리는 '20대들 너희가 희망이다'는 내용을 담았다는 책광고. http://newstice.tistory.com/868 무려 카테고리도 김용민/책 이다. 이 얼마나 뻔뻔 당당한가! 여기서도 사실 내용은 별다를게 없다. 자기 반성이라는게 고작 '니들은 개새끼가 아니었다 내가 착각해서 미안'이라는 복권의 메시지다. 니들은 답이 없어서 내 말도 들리지 않고 그냥 포기하려고 했는데, 나의 동반자가 될 싹수가 좀 보이더라는 복권의 메시지. 정말 은혜로워서 눈물나게 고마울 지경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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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한윤형씨가 최근 밝힌 바에 의하면 김용민씨 본인은 20대 중반인 97년 대선에서 아주 당연하게 이회창을 찍었던 사람이고, 그 후로도 평탄하게 직장생활을 해 오다가 30대가 되어 부당해고를 당한 후에 정치적 각성을 했다고 한다. 이는 나꼼수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했다고 하는데, 나꼼수를 들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여러가지" 의미로 충격적인 정보였다.

정말 기막힌 이야기다. 요약하자면, 자기 자신은 20대때 별 생각없이 살았고 반DJ였다가, 30대때 이른바 각성을 한 이후에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런 삶을 밟아온 사람이 20대들이 (30대 중후반인 현재의) 자기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답이 없다고 구박한 꼴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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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알게 되고 나서 나는 이 사람이 과연 최소한의 자의식이란게 있는가 의심이 들고 있다. 김용민씨는 스스로를 목사 아들 돼지라고 칭한다던데, 이것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말에서, 그는 확실히 돼지에 가까운 존재다.

내 생각에 그는 근대적 인간이 아닌 것 같다. 그냥 캐릭터다. 자기의 인성을 지워버린 거다. 뭘로? '기득권에 맞서는 정의'로. 이미 자신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상징, 심볼이 되어 버렸다. 누구처럼? 예수처럼. 이 땅의 적지 않은 목사들이 자신에게서 인성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못된 습관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 동료들로부터 정말 좋은거 배워왔다는 생각마저 든다.

인간적으로 그럴 수가 있나? 자기도 안한, 아니 못한 짓을 남들이 자기생각대로 안하고 있다고 구박을 할수가 있나? 그정도의 이야기를 지적받았는데 뜨끔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미 여기서 나는 그에 대해 최소한의 나사가 풀려버렸다고밖에 결론지을수가 없다.

아니 그런 전적을 가지신 분이 사과를..... "그래 니들은 개새끼가 아니었어 미안" 이러고 넘어간다는게 아주 아름답다. 아름다운 자기 긍정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했다면 모르겠다. "아 맞다 알고보니 나도 20대떄 그랬었어, 니들도 (나처럼) 희망이 있어." 그러나 절대 그는 그렇게는 말 못하는 사람인거다.

나경원의 주장에는 주어가 빠져있다만, 김용민의 주장에는 주체가 빠져있다.
과연 누가 더 심각한가?

이런 사람은 막말로 생물학적 인간 외에는 인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시킨 사람이다. 나는야 민의의 대변자. 나는야 정의의 수호자. 나는야 기득권을 위협하는 자. 나는야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자. '나'는 없고, '목소리'만 있는 스피커같은 존재.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내용이 비판받으면, 아마 그는 '나는 그저 소리를 내는 도구일뿐'이라고 변명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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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지난주에 공지영씨 인터뷰를 보면서 빡치고, 그 지지난주에는 추석특집호에서 "기득권=강남" 상징에 빡친 점때문에 과연 이것이 '이따위'라는 자극적인 말까지 붙여가며 비판할만한 일인가 하고 내 비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생각할지 모른다. 이렇게 기를 모아 분노를 뿜어내는 내가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은 그때 그때 글을 쓰지 않은 내 잘못이다.


요즘은 시사IN을 읽을때 차례대로 읽지 않는다. 외부기고가 있는 가장 뒤부터 본다. 외부기고는 비교적 독립적인 주장을 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글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나머지 기사를 기분좋게(적어도 기분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앞에 있는 편집국장의 코멘트가 마음에 안들면 온종일 기사를 읽으면서 기분을 잡칠 수밖에 없다.


이번 호 편집국장의 편지는 역시 <도가니>를 다루고 있다. 도가니와 그가 최근에 읽은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연결시켰고, 그것을 사회적약자, 사회안전망, 원전문제, 복지문제로 풀어내고 있다.

물론 나는 글이 엄밀하다느니 팩트가 틀렸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 쓴 '편지'라는 이름의, 일종의 편집후기인데 내가 그걸 따져서 뭐하게. 나는 편집국장의 생각을 따지고 싶지 않다. 그냥 어느부분이 내가 불만인지 내 생각을 말할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폭행을 당한 열세 살짜리 청각 장애아는 자신을 도와준 교사에게 "선생님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엄마 아빠도 없이 국가 권력/토호 권력에 의해 유린된 아이들. 며칠 간 이 아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곁에서 잠자는 아들 녀석의 팔다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내가 왜 공지영씨 인터뷰에 분노했는가. 왜 강남이란 상징에 반발했는가. 어쩌면 이 글에 대한 불만도 같은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


'국가 권력, 토호 권력에 의해 유린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그래?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지난 3월 예전에 부모에 의해 이루어진 아동범죄(폭행, 신체절단, 성폭행)와 사건 이후 약 20년이 지난 현재의 모습을 다시 취재한 "당신은 나를 기억하나요 - 아동범죄 그 후" 편을 내보냈다. 여기서의 부모들은 하나같이 그 자신들 혹은 자신들의 형제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저지른 아동범죄에 대해 수수방관하거나 언급을 꺼리고 후유증을 겪는 자식들을 정신이상자로 몰거나 했다. 
(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010101&vProgId=1000082&vMenuId=1001376&cpage=7&vVodCnt1=00794&vVodCnt2
=00&vSection=V5&vCompressCode=T1)

자 이건 어떤가. 이건 그렇다면 '가족권력' 혹은 '부모권력'에 의해 유린된 아이들인가? 그들이 강자의 입장인 부모라서 아이들이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인가? 어디 아들을 가진 어머니로서 '강자'의 입장에 계신 편집국장님께 한번 묻고 싶다.



나는 누구든지 그 대상이 어느 지위에 있어서, 혹은 어느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비판당하는 경우는 좀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까더라도 '누구라서' 까지 말고 '누구의 어떤 점이 문제라서' 깠으면 좋겠다.

그래서, 토호권력과 국가권력을 해체하면 <도가니>와 같은 형태의 문제는 과연 사라지는 것인가? 우린 이제 좀 솔직해지자. 그 자리에 있어서, 그들이 권력을 가졌기에 그런 짓을 했다는 식의 수사는 결국 "나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랬을 수도 있는데"라는 말과 등치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짜 원인은 그들이 권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이것은 장애인 인권, 아동 인권 문제다. 권력의 문제뿐 아니라 해결방법은 사회전반에 걸친 인식문화에 있다는 점을. 그러나 그들은 절대 건설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선한 잠재적 피해자이며, '그들'은 언제나 악한 잠재적 가해자로 설정할 뿐.



제발 누구를 이름표를 붙여서 거기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싸잡아서 공격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종북을 까려면 종북의 논리를 까고, 앱등이를 까려면 앱등이들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그것을 까라. 너 앱등이지 하고선 "앱등이들은 무작정 답이 없다"거나. "종북은 답이없다"는 식의 대중적 유행에 불과한 수사는 이제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 '기득권', '강남', '토호권력'이 문제라는 수사를 써가면서 마구 날선 소리들을 하는 당신들, 나는 당신들의 자식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도가니> 못지 않게 끔찍한 '부모권력'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 줄수 있다. 왜 이런 말을 할수 있냐고? 그것은 바로 당신들이 '강자'인 '부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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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09 13:35

    너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데 길들여져서 그런것 아닐까?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10 03:21 신고

      소위 386이라 불리는 그 세대들은 너무나도 강력한 폭력에 맞서야 했고 그들의 실존적 고민과 노력과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

      문제는 그러한 세계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포기하지 못하고 세상을 그에 맞춰 해석하려는 인지부조화가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고, 이에 수반하는 사회적 해악이 어마어마한듯...

  2. addr | edit/del | reply JayTee 2011.11.06 19:23

    이분법적으로 보고있을 수도 있고, 그런 독자들의 성향을 충족시켜주려고 일부러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상술일수도 있겠죠ㅋ 형 티스토리 글이 정말 좋은건 잘 알지만 '그렇게 써서 장사가 되겠냐'는 문제는 다르니까요ㅋㅋ 가장 힘든건 우리같은 사유체계로 사회를 분석하는 사람들이 정치세력화되기 어렵다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일단 분명한 적과 우군이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하나의 깃발아래 쉽사리 모일 수도 없는 사람들이고ㅋㅋ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1.07 20:47 신고

      내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좀 있어. 자유주의 정당에 목말라하는 그런 사람들... ㅋ.... 안철수 열풍 불때 약간의 기대심리를 품었던 것도 있었지.

광주 정신이 뭔데?

2011. 8. 26. 00:58 from 내 글/중문


나는 4.19와 6월 항쟁을 제치고, 매번 정치적 수사로 즐겨 인용되는(5월만 되면 흘러넘쳐나는) 광주 정신이라는게 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만약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의 정신이라면, 왜 하필 그게 헌법에 명시된 4.19가 아닌 광주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표상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겠다.

감히 말하건대, 1980년 5월의 광주가 4.19나 6월 항쟁과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개양상과 결과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서는 4.19, 6월 항쟁과 함께 광주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로 한묶음이 되는 한편 정치가나 사회운동가들은 열심히 '광주 정신'과 '이 투쟁은 광주 정신의 계승' '제 2의 광주'라는 언술을 쏟아내고 있다.

1980년 광주의 '양상'은 마치 4.19나 6월 항쟁과 다를 바 없는 데모 수준에 불과할 것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 활자와, 그들의 '정신'은 나머지 시민운동의 시민들의 정신과는 질적으로 다른 숭고함으로 추앙받고 있는 언술이 공존하고 있다.

광주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를테면 부마항쟁 때 군부가 군대로 모든 교통로를 끊고 무단 학살을 벌일 경우 부산/마산 시민들이 그냥 아무 저항도 없이 달게 쳐죽을거라고 상정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광주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선것은 당시 상황 하에서 실존적으로 선택할 만한 처사였지 그 정신이 정의롭고 숭고해서가 아니다.

숭고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숭고해진 것이다. 내가 알기로, 광주/전남 지역 사람들은 절대 광주 정신 운운하거나 제2의 광주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진보인사들의 광주 사건의 지나친 남용과 과소비에 대해 우려한다. 그런데 일부 진보인사들과 운동권들은 광주 사건의 과소비에 대한 광주/전남출신 사람들의 우려를 접하면 오히려 그들을 다그친다. 성역화 하지 말라고, 박제하지 말라고. 

나는 그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전두환이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는 숭고함을 아직도 고집하는 것이 불쾌하다. 자신들이 선의를 가지고 감히 나서서 소수자와 약자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양심적 제3자'인 사람들의 오만함이 불쾌하다. 나 또한 너희들과 같은 피해자라며 수많은 자기들을 위한 투쟁의 서두에 1980년의 광주를 걸고 시작하는 그 인질극이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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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Fulton 2011.08.26 09:10 신고

    베리 굿.

  2. addr | edit/del | reply 하늘을 나르는 물고기 2012.03.10 12:05

    광주정신은 불의에 항거, 정의에 대한 믿음과 생명에 대한 공유, 남을 배려하는 질서와 인정. 이런거지요. 뭐 대단할 일도 아니지만, 너무 당연한 일. 한건의 사건 사고도 없이, 댓가를 바라지 않은 희생정신. 이런것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요. 지금 광주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지금은 그럴 수 없을겁니다. 우리가 이제는 도달 할 수 없는 도덕과 정의의 샹그릴라.

    • addr | edit/del 어웅 2013.06.05 10:15

      바보같은 소리군요. 희생정신? 희생하고 싶어 희생정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뭉쳤다가 희생된 겁니다


빈 깡통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봄날 오후의 버스는 여의도를 지난다. 점심시간이라 나온 직장인들로 거리는 나름 활기차다. 직장인 생활의 분주함에 비하면 학생은 낙원 수준이라던데, 저들은 얼마나 바쁘고 힘겨울까? 학생의 울타리를 한번도 벗어난 적 없는데도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내가 스스로 대견스럽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한다.
 
 
 
저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겠지? 명색이 대학생이라는 우리 남매, 동생이 집에서 책 읽는 모습은 본 적도 없거니와, 나조차도 학기가 시작되면 따로 책 읽기가 쉽지 않다 생각할 정도니. 그래, 아마 저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이 그렇게 책을 안 읽는다던데.
 
 
 
나는 어떨까? 나는 열심히 읽어야지. 좋다,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물론 본업에 충실하는게 더 힘든 일인 것 같다) 어느새 나는 또 언젠가에 이루어질 <무릎팍도사>같은 위인전 포맷의 방송출연을 가정하고 있었다. 사회자가 내게 묻는다. 아니 대체 그 바쁜 틈에 어떻게 그렇게 따로 독서를 할 수 있나요? 나는 대답한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 것 같아요. 책은 이렇고 저렇고…”
다시. 이렇게 훈계조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습관이 되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하면된다' 세계관은 내 쪽에서 거부하겠다.
 
 
 
“제가 이상한거죠. 사실 너무 일이 많아서 책 읽을 틈이 없잖아요 한국사람들”
이건 뭔가에 기대어 핑계를 대는 것 같다. 책 안읽는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변호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의 특별함을 부각시켜 거만해 보인다.
 
 
 
“아마 일이 고되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책을 읽고 싶어도 읽기가 쉽지 않네요”
 
 
 
아, 나는 단순히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책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세 번이나 NG를 내지 않고도 단번에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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