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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세계시민주의


월든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레,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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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감상문


 
 
19세기 미국의 한 지식인이 월든이란 이름의 호숫가에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일을 쓴 이야기. 책 겉표지의 제목 위엔 ‘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불멸의 책’이라고 적혀있고, ‘법정 스님이 가장 사랑한 책’이라는 수식어구가 추가되어 있다. 역자는 <월든>의 저자인 소로우가 19세기의 인물이지만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며[각주:1] “아마도 최초의 녹색 서적을 저술한 최초의 환경보호론자이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각주:2]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녹색이나 생태, 환경의 테마로 이 책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되었을 때 단지 생태주의나 문명 비판, 무소유 정신 정도로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여타 다른 종류의 책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그런 내용의 책이 19세기에 쓰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쓰인 책이 21세기의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생태주의의 관점으로만 설명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태와 환경을, 그리고 시대상을 넘어선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려한 글을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거리두기’에 능한지 금세 느낄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시대상의 편견에 함몰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탁월한 관찰력과 직관으로 사람들의 모순을 꼬집어낸다. 아니 꼬집는다기보단 헤집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나 또한 소로우의 비판에서 자유로운 바는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신이 나서 그의 내러티브에 빠져들 때가 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토스타인 베블렌의 저서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할지도. 이런 부분에서 그는 훌륭한 문화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의 소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19세기 미국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마치 눈에 펼쳐지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비합리적인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바로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배경이 되는 시대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미개인’ ‘인디언’ ‘철도’ ‘농장’ ‘노예’ ‘바느질하는 부인들’ 등의 어휘는 이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채소엔 뼈가 될 성분이 없기 때문에, 채소만 먹고는 살수 없다”는 한 농부의 충고 아닌 충고에 소로우가 “그런 농부도 꼬박 풀만 먹고 자란 소가 쟁기를 끌도록 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있다”[각주:3]고 꼬집는 부분은 지금으로선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 그 농부와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는 이는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로우는 19세기 주변 사람들의 생활상과 모순을 비판하고 있는데도 현재 우리에게 그의 비판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그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느끼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역시 그가 어떤 특수한 개별 행위를 놓고 꼬집은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통찰력이 2세기를 넘어서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통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단지 소로우가 시대를 앞선 천재였을 뿐인가? 이 두 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본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며 그 키워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가 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미리 하자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세계시민적 사고'이며,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소로우는 당대에 통용되던 속담에서부터 자연과학적 지식, 성서나 그리스 신화와 철학, 고대 중동의 역사나 로마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승지식은 물론 중국과 인도의 철학까지 풍부하게 인용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의 힌두 경전인<바가바드기타>의 철학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논어는 물론 맹자와 대학까지 인용하는 것은 적잖이 놀라웠다.[각주:4]

 
 
그는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의 고전양서를 구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껏 <아동독본>이나 <리틀 리딩>수준의 이야기책과 최신 가십거리를 다루는 신문을 읽는 데에 그치는 주변 이웃들의 독서 경향을 비판한다.[각주:5]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 민족 말고도 경전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각주:6],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각주:7] 등의 이야기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지혜에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콩코드 교외에 있는 한 고독한 농부의 종교적 체험과 믿음이 수천 년 전에 조로아스터에게도 있었고, 그 농부와 똑같은 길을 걸었고 똑같은 체험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소로우는 조로아스터가 현인(賢人)이어서 그 경험이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콩코드의 농부와는 달리 하나의 종교를 창시할 수 있었다고, 보편성의 자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각주:8] 이미 그는 전 지구적, 전 세계적 수준의 보편성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 연표를 보면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토록 풍부한 동서고금의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외 곳곳을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평생의 대부분을 고향근처에서 지내는 등 미국 땅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대서양에 해저전신을 가설하기를 바랐던 당시의 교통 통신수준[각주:9]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관점을 지녔다는 것은 그의 생애 자체가 현대적이었다는 증거다. 지금과 같은 유비쿼터스 환경이 없었음에도, 미국의 구석에서 평생을 보낸 이가 200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공간을 넘어 지금 한국의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나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알아도 저서를 읽지 않는 것은 플라톤이 옆집에 사는 이웃임에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각주:10]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소로우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소로우가 현대적 감각을 가진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서, 그가 다른 필부들과 달리 자유를 외치고 세계 보편적 사고를 지녔다고 해서, 그를 단순히 독립적인 인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질문 -소로우의 통찰력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이유다. 그는 미국인이며, 미국적 사회 풍토에서 등장한 인물임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로우 자신은 주변 이웃들(미국인)에게 쓴 소리를 퍼부어댔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와 같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존재했으며, 미국은 그러한 지식인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이 현대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원동력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 시대의 미국 사회를 보고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감탄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10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떤가. 1990년대 문민정부에서 세계화와 지구촌을 주창한 이래로,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고 그때에 비해 세계화란 용어는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구촌이란 단어는 이제는 굳이 언급해봐야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세계시민의식은 낙제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사회시간에 문화나 역사 부문에서 세계적(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대비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 우리에게 세계적 보편성의 인식과 존중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세계적 보편성에 함몰되어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게(?) 우리의 고유한 특수성을 주체적으로 지키자고 강조하며 마무리하는데, 조금 쓸데없는 걱정처럼 느껴진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모순과 부조리라 할지라도 ‘현실적’, ‘한국적’ 따위의 수식어로 고수되며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특수성(Local Rule)이 너무나도 강력한 권위를 지녀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어떻게 중․고등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신체(머리카락)를 함부로 억압적으로 규율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떤 교사가 아침에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규율하고 나서 교실에선 아무 거리낌없이 천부인권을 가르친다고 상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2010년 현재까지도 두발규제 논란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논란이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자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최근 저 너머의 국가에서 독재 권력이 3대째 세습되는 것에 대해 ‘내정간섭’이라며 애써 판단을 유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한 정치집단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히틀러가 침략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내정간섭이라며 판단을 유보했을까? 세계사적 보편성의 자각이 있다면, 그렇게 비상식적인 우호와 궤변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가르치자는 따위의 수준 낮은 논란을 수시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세계화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정신(문화)적 과제는 세계 보편성의 인정과 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고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세계를 느끼고 가졌던 한 미국인이, 팝송을 흥얼거리고 외국어를 배우며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닐 수 있지만 세계적 시야로 상상․사고하지 못하는 일군의 한국인들의 사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아닐까.
 
 






  1. H. D. Thoreau, 「월든」, 강승영 옮김, 이레, 2004, p. 479 [본문으로]
  2. 위의 책, p. 481 [본문으로]
  3. 위의 책, p. 19 [본문으로]
  4. 위의 책, p.137, p.315, p.313 [본문으로]
  5. 위의 책, pp. 153-154 [본문으로]
  6. 위의 책, p. 154 [본문으로]
  7. 위의 책, pp. 155-156 [본문으로]
  8. 위의 책, p. 156 [본문으로]
  9. 위의 책, p. 77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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