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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6 잉여예찬

잉여예찬

2010. 12. 6. 20:00 from 내 글/중문


한 한국인 교수[각주:1]가 미국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던 시절, 그의 지도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헤겔식의 역사주의에 젖어 있는지 모르겠군. 그 색깔 고치는 데만 10년 가까이 걸린다네. 근데 자네는 다행히 한 3년밖에 안 걸린 것 같군” 모든 과목에서 ‘계승’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올바른 결론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교과서를 떠올린다면 허투루 나온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싶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다. 10대 때 하지 않으면 안 될 30가지, 20대 때 하지 않으면 안 될 40가지, 30대 때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따위 책들은 안 읽지만 실제로 고등학생 때 나는 한 달에 한번 수능 모의고사라는 관문을 넘어야 했고, 이제 대학에 와서는 일주일에 한두 개 꼴로 ‘내 글’을 써내야 한다. 사실 나는 같은 처지에 놓인 동기나 학우들에 비해 훨씬 여유를 부리는 편인데도, 종종 제대로 쉰 적은 없다는 뻔뻔한 생각을 한다. 왜 뻔뻔하냐면, 다들 내 생활을 실제로 들으면 좀 더 성실해지기를 촉구하니까. 한국인은 모름지기 부지런함이 생명이다. 과업과 약속으로 꽉꽉채운 달력을 보면서 흐뭇해해야 하니까.
 


 
 
지난주 수업을 들으러 220동을 걷던 중 멈칫하며 생각했다. ‘그래, 다시 이 시기가 온 것이구나.’ 요즘 나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고, 가시적인 성과도 없이 계속 불만족스럽고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 확신과 열정에 차서 굴려왔던 몇 가지 머릿속 생각들도 다 쏟아내고 났더니, 그 다음부터 만들어지는 생각들은 죄다 흐릿한 것들이다. 이제는 아예 생각하는 일조차 귀찮아지고 있다. 아마 지금 시점에 <파우스트>를 읽고 글을 써내야 했다면 그 글보다 훨씬 흐리멍텅한 글이 나왔겠지.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이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이런 현상을 그리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다. 그 당시에는 지지부진하다고 느껴왔던 그 때가, 곰곰이 지나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가장 뚜렷하게 성숙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성장통이라는 것은 신체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듯이, 머릿속에 맴도는 열병같은 답답함 속에서 우리는 한층 성장하는 것이다.
 

 
 
아무 하는 일 없어보이는 잉여생활에서 창조성이 나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가에서 생산이 나오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하기 위해선 놀아야 한다. 그것은 ‘정체’나 ‘퇴보’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낼 부분인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한가로운 생활을 하길 원하면서도, 막상 그러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만족하기보다는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후회한다. ‘오늘 하루 정말 할 일없이 보낸 것 같아’, ‘좀 더 생산적으로 알차게 보낼 수 있었는데’ 하면서. 그 죄책감은 누가 심어 놓은 것일까. 니체가 기독교의 원죄와 양심의 가책의 문제를 뒤흔들어놓듯, 이제 우리도 그러한 ‘보람찬 하루’의 도덕적 강박관념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1.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임 모 교수라고 한다. 본문의 이야기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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