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저자
일레인 페이절스 지음
출판사
루비박스 | 2006-05-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나그함마디 문서를 분석하는 책. 이 책은 1945년 이집트의 한...
가격비교

 

다음은 독서모임에서 책을 소개하기 위해 메모한 것이다.

 

 

0. 나그함마디 문서란

- 영지주의 문서

- 외경으로 분류

- 그동안 영지주의 자료가 부족했으나 이 문서의 발견으로 큰 진전을 이룬다 (사해의 쿰란 사본에 비견될만 하다)

 

1. 영지주의란(정보제공)

- 기독교 초기의 최대 이단(라이벌) 집단

- 비밀결사, 음모론적, 엘리트주의적

-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 영지주의

- 급진적, 진보적, 평등주의적 성향

- 정립된 교리보다는 통찰에 의한 창작, 재생산을 중시

 

2. 초기 기독교 역사 배경

- 중구난방, 각자 지역단위에서 결사

- 하나의 교회가 된 것은 (니케아)공의회

- 그러나 그 이후에도 정통/이단 논쟁은 끊이지 않음

- 정경, 외경의 기원 문제

 

3. 교회 조직의 딜레마

- 조직의 안정성이냐 유연성이냐

- 위계질서, 구조의 문제

 

4. 정통 기독교 교리/교회가 승리한 배경

- 보편 타당한 교회 지향의 안정성

- 순교의 문제 + 예수의 인성 논쟁

; 그러실 분이 아니다 힝 속았지? + 순교는 만용 진짜 중요한건 영성 획득 vs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다 + 순교에서 드러난 성스러움과 전도 효과

 

5. 한국 개신교 문제

- 구원파 : 음모론적(사실은 이거다), 엘리트주의적(깨달음 강조. 우리가 더 잘 가르치고 안다) 측면에서 비슷함 공유

- 진보 개혁적 개신교/일부 이단 사이비 : 영지주의 세력의 행태나 주장과 연결고리 존재(여성 사제 문제, 어머니 하나님 등)

- 일부 비기독교인의 주장 : 예수의 가르침은 교회에서 왜곡되었다. 왜곡되고 변질된 기독교는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 영지주의에 매몰될 가능성 무시못함 

- 한국 개신교의 딜레마 : 목사숭배. 개신교는 사제의 권위를 부정하며 출현했지만 교회 조직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같은 길을 갈수 밖에 없다.

 

6. 이 책의 감상포인트

- 영지주의 자체에 대한 정보 : 오잉 요런게 있었네?

- 초기 기독교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초적이고 암시적 정보획득 : 원래부터 교회는 전세계에 하나 아니었어? 아님

- 교회조직의 성장배경과 딜레마 << 내가 읽으면서 영감을 받은 포인트

- 주의할점1 : 영지주의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심판관의 눈으로 이 책을 끝까지 부정적으로 탐탁찮게 보는 시각이 있을수 있음

- 주의할점2 : 환단고기 하악하악 싸이언톨로지 하악하악 처럼 영지주의를 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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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2011. 10. 4. 15:47 from 책/발췌





문화의 패턴

저자
루스 베네딕트 지음
출판사
연암서가 | 2008-08-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문화의 패턴,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2008



pp.57-60

인생의 방향과 환경의 압력, 풍성한 인간의 상상력 등은 인간에게 많은 가능한 단서들을 제공했고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사회가 유지되는 데 봉사하고 있다. 그런 가능한 단서들로는 사유 재산 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 내 계급이 있다. 또 물질적인 것들과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있다. 성생활, 부모 노릇, 부모 노릇 이후의 역할에 따르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사회에 구조를 제공하는 조합과 컬트가 있다. 이런 여러 단서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하여 문화적.의례적 정교화를 이룩하여 어떤 문화적 에너지를 독점하는가 하면, 다른 문화적 특징들의 구축에는 별로 에너지를 쏟지 않기도 한다. 서구 문명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생의 어떤 측면들이 다른 방향으로 문화를 구축해 온 부족들에게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무시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부족의 문화가 빈약한 것은 아니었다.

문화적 생활의 이런 특징은 언어의 특징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선택이 필수적인 것이다. (...) 언어학 연구의 기본 전제는 각각의 언어들이 이 무수하게 많은 소리들 중 어떤 것들만을 선택하여 활용 음소로 삼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문화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인간의 연령대, 자연환경, 인간의 활동 등 다양한 관심사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 어떤 문화의 정체성이란 바로 이런 스펙트럼의 어떤 부분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 각 문화는 자신의 관점에 입각하여 다른 문화가 중시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다른 문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항들을 정교하게 개발했다.




p.336

사회 관습을 연구할 때, 문제의 핵심은 연구 대상의 행동이 사회적 수용이라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역사만이 사회적 수용과 거부를 설명할 수 있다.



pp.358-360

우리가 점점 문화를 깊이 인식할수록 익숙해져야 할 어려운 훈련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지배적인 특성을 심판하는 훈련이다. (...)

우리 자신의 지배적인 특성에 대한 평가가 지금까지 지체되는 바람에, 그 특성은 이제 더 이상 살아 있는 쟁점이 되지 못한다. 종교는 객관적으로 논의되지 않아 오다가, 더 이상 우리 문명이 깊이 의존하는 문화적 특성이 아닌 게 되자 비로소 처음으로 비교종교학 분야에서 자유롭게 쟁점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논의하기가 아직은 불가능하고, 전시에 전쟁과 국제 관계의 문제 역시 논의할 수 없는 금기 사항이다. 그래도 우리 문명의 지배적인 특성을 아주 정밀하게 조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문화적 특성들은 인간의 행동에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 사항이 된 게 아니라, 우리 사진의 문화에서 지역적으로 과도 성장했기 때문에 강제 사항이 되었다.


p. 361

사실, 사회와 개인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문화는 개인이 삶을 영위하는 원료를 공급하고 있다. 만약 문화가 빈약하면 개인은 고통을 겪는다. 풍요로운 문화라면 그는 기회를 잡고 위로 향상될 가능성이 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은 전통적으로 축적된 풍부한 문명으로부터 개인적 관심사에 대한 도움을 받는다. 가장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은 전통의 장치와 기준 내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전통을 살찌울 것이고 실은 이게 더 중요하다.



pp. 364-366

(...) 따라서 모든 구성원의 모든 체질적 반응이 그 문화의 제도를 지지한다는 이론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개인적 생활사를 그의 체질과 연관시켜야 하고 나아가 이런 체질을 임의적으로 선택된 정상성(normality)과 대비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의 체질적 반응과, 문화제도가 스펙트럼에서 선택한 행동들을 서로 관련시켜 보는 것도 필요하다.

(...) 하지만 사회 구성원 전원이 하나같이 그것을 자신의 체질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잠재력이 사회가 선택한 행동 유형과 일맥상통하는 사람들은 유리한 고지를 점한 행운아들이다.



pp. 372-375

개인적으로 부의 축적을 추구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문명에서) 부랑자 인구를 지원해 왔다. 이들이 부랑자들과 동맹을 하면, 일반 여론은 그들을 잠재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보아 버린다. 또 그들은 그런 동맹으로 인해 반사회적 상황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결국 나쁜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부랑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예술적 기질을 발휘하여 해외로 나가 사는 이탈적 예술가 그룹의 일원이 되면, 일반 여론은 그들을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으로 본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사회적 제도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그들 자신을 만족스럽게 표현하지 못한다.

이런 개인의 딜레마는 종종 자신의 자연적 충동을 강력 억제하고 문화가 중시하는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성공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런 대안밖에 없는 것이다.

(...) 

불행은 그의 타고난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런 자질의 배출구를 마련해 주지 못한 문화의 탓이었다.


pp. 385-386

이처럼 불안정한 인간적 유형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만든다. 만약 특이성을 인간적 행동의 가장 소중한 변종이라고 취급한다면, 문제의 인물은 그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훌륭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처럼 사회적으로 적응하는 유형과 적응 못하는 유형을 구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고정된 "비정상적" 특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문화의 제도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일탈자들이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보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활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체질적 반응이 사회의 지원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피어(Edward Sapir)가 말했듯이, 그들은 "견딜 수 없는 세계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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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내셔널리즘의 해체 - 로컬리티 번역총서 2

저자
이건지 지음
출판사
심산 | 2010-06-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 책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장소와 관련하여 보통에서 배제된 사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한일 내셔널리즘의 해체 - 복수의 아이덴티티로 살아가는 세상,
이건지 지음, 김학동 옮김, 심산, 2008



pp.13-15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특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 ‘보통의’라고 했는데, ‘보통’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보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보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른바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이 실은 이 배제의 과정에 의해 확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은 ‘응당 배제되어야 하는 이가 아닌 자’로서 정의될 수 있을 뿐, 그 자체는 결코 반석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보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pp.25-27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인)>을 단순화하고 이미지화했듯이, <외국(인)>을 단순화하는 것(흑인은 어떻고, 중국인은 저렇고, 한국인은 이렇다는 등)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배타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게도 결점은 있다’라고 외국인 앞에서 털어놓는 ‘겸허함’이나 ‘선의’까지 내포하게 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양친의 국적이 다른 사람의 경우는 끊임없이 자신이 <외국인>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심리적 압박 때문에 자진해서 어느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무의식적인 선의의 내셔널리즘’의 폐해이다.



pp.46-47
내셔널리즘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몹시 애매하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말하는 ‘내셔널리즘’과 일본에서 말하는 ‘내셔널리즘’의 의미가 동일하다는 보증은 없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한국에서의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는 별개이며, 후자는 올바른 주장으로서 비판 대상이 되기 힘든 상황이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내셔널리즘을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하여 금세기에는 그러한 풍토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젊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팬시 상점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쓰인 상품이 다른 귀여운 상품들과 나란히 놓여 있기도 하다. 일본에서 언급되는 ‘내셔널리즘 비판'보다도 한국의 ’내셔널리즘 비판‘쪽이 성역을 남기고 싶어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pp.111-
예를 들면 재일조선인과 같은 마이너리티 운동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민운동 등의 지원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시민운동가들은 때때로 재일조선인을 중심으로 받들면서 그 후방을 지원하는 운동 형태에 의문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자칫 재일조선인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재일조선인을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사회에 호소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인용문(강상중, <재일>의 내용으로 강상중씨가 지문날인에 반발했다가 결국 날인을 했다는 에피소드, 편집자 주) 중에 등장하는 지원자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운동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으며, 필시 반권력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자임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라는 ‘외지’ 출신자를 ‘당사자’로 규정하고, 자신은 후방지원으로 ‘사회선’을 행하고 있다는 인식에 대해 역시 문제가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내지>는 비‘내지’ 혹은 ‘외지’를 배제함으로써 담보된 거울에 비친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재일조선인 문제도 ‘내지’의 문제이자 이를 만들어내는 무의식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만약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 지원자도 후방 지원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제로서 싸웠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강상중씨에게 불만(지문날인거부를 중단하고 날인을 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편집자 주)을 제기한 지원자는 스스로가 이와 같은 ‘무의식’에 의해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을 나누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지원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불쌍한 재일조선인을 위해 일본인의 양심을 대표해서 지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재일조선인을 일본 사회로부터 ‘절취하는’ 점에 있어서는 체제 못지않게 배제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p.141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쟁취한 한국의 시민운동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386세대’라는 말에 ‘대학에 입학한’이라는 조건이 들어있는 점에서 필자는 위화감을 넘어서 분노마저 느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학생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민주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며, 별생각없이 ‘386세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저학력자를 차별하는 ‘선민의식’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pp.173-174
이 무렵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이상을 온갖 대중 매체를 통해 전파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1930년대에 태어난 ‘황국 소년’세대일 것이다. 그보다 이전 세대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이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
황국 소년이 일본의 ‘성전’ 사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순수하게’ 그것을 이행하려 했던 탓으로 현실적인 전투의 ‘더러움’에 분노해 간다는 상황은 한국의 ‘고도성장의 내셔널리즘’(보수 세대)과 ‘저항 민족주의’(민주화 세대)의 대립에 견주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p.190
재외 교포, 예를 들면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에서 ‘절취당하는’ 존재이다. 그것을 한국 사회는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코리언 디아스포라’라 부르며 포섭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끌어안고 절취’하는 행위이자 무의식의 배타성을 내포한 ‘선의’의 ‘큰 내셔널리즘’으로서, 사실상 ‘한국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기’ 우해 재일조선인을 이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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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BlogIcon Fulton 2011.09.01 08:38 신고

    종종 디아스포라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기도 해왔음.

감염된 언어

2011. 8. 30. 05:53 from 책/발췌




감염된 언어

저자
고종석 지음
출판사
개마고원 | 1999-06-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기자를 지내고 제망매 등의 소설집을 낸 저자의 우리나라 언어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감염된 언어, 고종석, 개마고원, 1999



pp. 90-91
저자(복거일을 말함, 편집자 주)는 ‘열린 민족주의’의 예로 혁명기의 미국과 프랑스의 민족주의, 그리고 19세기 이래 약소민족의 민족주의를 든다. (...) 내 생각으로, 혁명 후의 미국과 프랑스를 자유롭게 한 것은 천부인권 사상이나 주권재민 사상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이념이었지,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20세기의 민족해방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주의의 융성이 한 민족의 독립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독립을 얻은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한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강대국의 민족주의든 약소국의 민족주의든, 얼마나 자주 대외적 패권주의와 대내적 집단주의를 가져왔는가?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미국인, 개인으로서의 프랑스인, 개인으로서의 신생 독립국 시민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 설령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였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




p. 121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굽이굽이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pp. 121-146
나는 여기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국어에 대해 취하는 세가지 태도를 검토하고 싶다. 그것은 독일형, 영국형, 일본형이라고 명명할 만한 것이다. 고유명사 대신 특징어를 집어넣는다면 폐쇄형, 개방형, 양방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특징들은 이 나라의 국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지칭할 뿐이다.
(...)
‘성실한 잣나무 협회’ ‘독일 애호협회’ ‘페그네시아 꽃 모임’ ‘엘베강 백조 교단’ 등의 향토적 이름들을 지닌 이 언어협회들이 수행한 언어운동 Sprachbewegung의 핵심은 ‘독일화’(Verdeutschung)였다. 즉 라틴어, 그리스어 같은 고전어와 특히 프랑스어에 깊이 침윤된 독일어 어휘를 순수하게 독일화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영국인들은 자기들 언어에 깊숙이 들어온 프랑스어를 배척하려 하지 않았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 뒤로도 여전히 궁중의 일부와 법정에서는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이런 너그러움의 이유(또는 결과?)가 되었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프랑스어의 수혈이 영어에 계열이 다른 유의어군을 형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원래의 앵글로색슨어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어가 그 위를 덮어씌운 셈이어서 영어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무수한 쌍의 유의어를 갖게 됐다. (...)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언어 가운데 영어만큼 어휘가 풍부한 언어는 없는데,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어가 기본적으로 외래어에 열려 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이렇게 일본적인 것, 일본어적인 것의 특이함을 찾는 분위기의 반대편에는 외국문화와 외국언어에 대한 열광이 있다. 고대 이래의 무수한 한자어 수입도 그렇지만, 메이지 이래 일본어의 유럽어 수입은 비유럽권 언어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오늘날 일본어 문장에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가나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 일본어를 배우는 서양인들이 원래의 일본어 단어보다도 유럽에서 수입된 단어를 배우기가 더 어렵다고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pp. 236-241
여기서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의 과도한 원음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나는 원음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그 첫째는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다. 이 원음주의는 한자 음역어를 한국음으로 읽는 개화기 때의 방식을 버리고, 원음에 가까운 한글 표기를 하자는 주장이다. 이 원음주의는 원칙상 옳고 자연스럽다. 우리가 덴마크를 丁抹이라고 쓰거나 ‘정말’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워싱턴을 華盛頓이라고 쓰거나 ‘화성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이런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 안에는 이와는 개념이 다른 원음주의가 있다. 이 두 번째 원음주의는 외국의 고유명사를 원음대로 표기하면서 한글이 허용하는 한 원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하자는 주장이다. 이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나는 ‘과도한 원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원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음주의를 고집하는 대표적 매체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일 것이다. 이 잡지에서 프랑스의 수도는 ‘빠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는 ‘프루스뜨’다. 프랑스어의 무성 파열음은 영어에서와 달리 무기음이므로 ‘파리’가 아니고 ‘빠리’이며, 그 무성 파열음이 R소리 앞에서는 유기성을 회복하므로 ‘쁘루스뜨’가 아니라 ‘프루스뜨’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원음주의자들은 프랑스어 첫걸음을 한국인들에게 걸리느라 바빠서, 프랑스어에서 Paris의 p와 Proust의 p가 동일한 음소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빠리’의 첫소리와 ‘프루스뜨’의 첫소리를 구별하는 원칙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려면 spy는 ‘스파이’가 아니라 ‘스빠이’가 되고, style은 ‘스타일’이 아니라 ‘스따일’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비는 아직까지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속생각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창비에서는 여전히 ‘스파이’고 ‘스타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
가령 그것(과도한 원음주의, 편집자 주)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 원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외국어의 음성학과 음운론에 통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학술단체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
가령 프랑스어 이름만 해도 누구나 다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알튀세르’라고 표기할 Althusser를 창비는 여전히 ‘알뛰쎄’라고 표기한다. ‘튀’를 ‘뛰’로 표기한 것이나 ‘세’를 ‘쎄’로 표기한 것은 예의 원음주의 때문이고, ‘르’를 잘라먹은 것은 이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부를때 프랑스인들은 마지막 r을 발음한다는 사실이 창비의 편집자들에게는 알려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
지난해 월드컵 축구경기를 계기로 포르투갈어 고유명사 표기에 일고 있는 개신 바람도 나는 우려스럽다. 예전같으면 ‘로날도’라고 표기했을 어느 축구선수 이름이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호나우두’로 둔갑했다. 표기방식이 바뀐 데에는 아마 어느 ‘위대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한 일은 그렇지않아도 혼란스러운 외래어 표기에 쓰레기 한 무더기를 더 던져놓은 것 뿐이다.
(...)
이 용감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선창에 힘을 얻어 <실낙원>의 저자를 ‘밀턴’이 아니라 ‘미으턴’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영어 전문가가 머지않아 나올지도 모른다. 또 분명히 어느 프랑스어 전문가가 그 뒤를 이어서 예술과 패션의 도시 빠히(파리)에 대해서, 그리고 미떼항(미테랑)과 호까흐(로카르)와 시하끄(시라크) 같은 정치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학술회의’는 처음의 그 포르투갈어 ‘전문가’가 호나우두의 조국은 ‘브라질’이 아니라 ‘브라지우’라고 외치며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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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09 13:39

    아는 형이 그러는데 호나우두라던지 외국이름들 바뀐거는 포르투갈어 전문가가 아니라 어떤 광적인 해외축구팬이 신문사에 지속적으로 항의해서 바뀌었다던데 ㅋㅋ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10 03:17 신고

      본문을 다시 보면 알수 있듯이 '위대한 포르투갈어 전문가' 라는 표현에는 그 사람이 정말 전문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기보다는 '하이고~ 전문가 납셨네' 할 때의 그 전문가라는 거지.

당신들의 대한민국

2011. 7. 20. 14:00 from 책/발췌





당신들의 대한민국 (221201140664)★

저자
박노자 지음
출판사
한겨레신문사 | 2001 출간
카테고리
당신들의 대한민국 (221201140664)★
책소개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당신들의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한겨레신문사, 2001

 

pp. 81-82

그러나 나에게 가장 부끄러운 일은 고려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9년 전에 일어났다. 그때 형편이 어려운 소련 학생으로서 무슨 부끄러운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당시 나는 그 대학 후문 뒤에 있는 한 성경 읽기 모임(개신교 성향을 띤 일종의 학생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 모임과 접촉하면서 일어난 일이 모두 마음속에 큰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첫째, 그 모임이 나를 처음부터 놀라게 한 것은 내가 과거에 속했던 소련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뺨치는 철저한 출석/회원 관리였다. 결석은 거의 '죽을 죄'로 취급되었고, 일단 회원이 되고 나면 그 모임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탈퇴를 '영적인 타락'으로 생각하는 그 모임의 지도자들은 거의 강요에 가까운 전화와 방문, 설득과 종용의 공세를 퍼부어 탈퇴를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
둘째, 그 모임에서는 기도를 비롯해 모든 신앙행위를 공개적으로 남 앞에서 해야 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었다.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서 남이 안 보는 데에서 하라는 예수의 말씀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남 앞에서 '나의 신'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에게는 남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남이 보는 데서 성행위를 하는 것과 같은 격이었다. 그러나 그 모임에서는...
(...)

 

p. 254

흥미로운 것은 그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아시아 이민 노동자가 '지방의 인심'을 이구동성으로 찬양한다는 사실이다. 양식과 도덕을 결여한 '국제화'가 일찌감치 돼버린 서울과 수도권, 부산 지역에 비해 지방은 한국 종래의 관용과 이타의 도덕을 정말 더 많이 보유하고 있을까?

 

p. 278

둘째, 인종차별론을 처음 수용한 개화파 양반 귀족들의 극심한 엘리트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론상으로 그들은 천부인권 사상을 충실히 받아들여 유길준의 유명한 말인 "범인이 세에 생함에 인되는 권리는 현우 귀천 빈부 강약의 분별이 무하니 차는 세간의 대공지정한 원리라"를 새로운 '대의명분'으로 열심히 내세웠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자신들과 상한(상놈)들을 결코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사치를 좋아하여 수많은 하인을 부린 참판의 아들 서광범도, 미국의 냉대에 실망하여 "미국인들이 양반을 몰라본다. 양반이 어떻게 노동할 수가 있냐?"고 외친 임금의 부마 박영효도 만인평등의 사상을 제대로 소화하고 실천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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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성립사정

2011. 3. 23. 07:04 from 책/발췌






번역어 성립사정

저자
야나부 아키라 지음
출판사
일빛 | 2003-03-26 출간
카테고리
외국어
책소개
-밑줄 일부 있음(대략 10 페이지 정도)[책소개]서양에서 들어...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번역어 성립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1982, 서혜영 옮김, 2003, 일빛

 

pp.33-34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의미의 말에 대해서 이쪽의 전래돼오는 말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뜻이 결핍된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pp.4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모난 문자'(한자 신조어)의 의미가 원어의 individual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말을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individual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새로운 문자의 건너편에 individual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약속이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자가 멋대로 한 약속이므로, 다수의 독자에게는 역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워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 측에서도 또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p.91
 
이와 같은 고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무릇 문자란 것은 권력적 지배의 도구라고 결론을 내린다. (...) 문자를 새긴 사람들 자신이 반드시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때때로 거울 문자라고 해서 좌우가 거꾸로 씌어진 것이 발견되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pp.106-107
 
그러나 키타무라 토코쿠의 '연애'는 역시 love와 똑같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는 "연애, 이 어찌 단순한 사모일 수 있을까"라고 분개하지만, love는 '단순한 사모'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키타무라 토코쿠는 그 부분을 잘라버리고 '상상의 세계의', '아성'으로서의 love만을 '연애'라고 정의했다. (...) 이리하여 관념으로서 순화된 '연애'는 당연히 일본의 전통이나 현실 안에 그것이 실현되기 어려워저간다. 따라서 '연애'는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밖에 서서 일본의 현실을 재단하는 규범이 되어간다. 이것은 일본에서 번역어가 걸어가는 숙명이다.
 
 
 
p.123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구 철학의 번역을 '존재'와 같은 한자 두자의 표현을 중심으로 해온 데에는 실로 지당한 까닭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pp.140-142
 
일본의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의견과 비판이 있었다. 특히 naturalism은 그 대표자 졸라가 자연과학자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서설>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과학의 방법을 흉내내어 소설을 쓰려 한데서 생긴 말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자연주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오해했다. 대표적인 비판자 나카무라 미츠오의 의견을 보도록 하자. 나카무라 미츠오는 자연주의 발생기의 기수였던 타야마 카타이가 "자연을 자연인 채로 쓴다"고 말한 것을 비판하여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 이와모토 요시하루가 "최대의 문학은 자연 그대로 자연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타야마 카타이는 "자연을 자연인 채로 쓴다"고 했다. 그리고 모리 오가이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은 미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면, 나카무라 미츠오는 "살아있는 자연"과 "작품에 옮겨진 자연"을 혼동안 타야마 카타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전래된 일본어를 번역어로 사용했을 때, 전래된 의미와 원어의 의미의 혼재는 이처럼 미묘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다. 자연이란 말은 nature라는 말이 일본에 오기 전에 이미 일본어로 사용되고 있었고 나름의 독특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또다른 개념을 가진 nature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고 하여 원래의 토속적 개념을 털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학자나 지식인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정하든, 현실에 살아있는 말은 소수자의 정의로 좌우할 수 있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말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인 것이다.
 
 
 

pp.156-166
 
권이란 우선 power, 즉 힘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 결국은 일본어로서의 권리 역시 '권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right는 서구 사상사에서 힘과는 대립하는 뜻의 말이었다.
(...) 니시 아마네는 그 뒤로 right의 번역어로서 '권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권'이라는 한글자로 된 말도 역시 사용하고 있다. (...) 다른 한편, 이 <헌법초안>에는 '행정권','입법권' 등에서와 같이 right의 번역어가 아닌 순수하게 '권력'이란 뜻으로도 '권'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 민권이라는 말에서의 '권' 역시 두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채 사용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자유 민권의 '권'은 right라기보다도 우선 힘이었다. 힘과 동등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다분히 '힘' 적이었다.
(...) 오늘날 우리들이 아는 '권리'는 남녀동'권'이라든가, 일조'권'과 같이 '권' 한글자만으로 표현되는 일이 적지 않다. '권'이라는 전래되어온 말의 뜻이 의연히 이러한 속에 혼재된 채로 살아남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right라든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통의'가 도덕적인 올바름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면, 이 한글자 표현인 '권'에는 어딘가 힘껏 밀어붙이는 느낌, 그러한 어감이 씻어지질 않는다. 예를 들어, 일상적인 회화에 이 말을 꺼내면 이야기가 갑갑해지기 일쑤인 것도 그 때문이다.
 

pp.171-180
 
'자유'라는 말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오래 전부터 이미 사용된 말(...)'자유'라는 말에는 '제멋대로'라는 식의 용례가 많다.
(...)
1879년에 나온 츠지 코소의 <개화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자유'에 대한 문답이 실려 있다.
(...) 찬성하는 자도 반대하는 자도 양쪽 다 그 뜻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양자 모두 심각하게 열중해서 '자유'에 찬성하고, 혹은 '자유'에 반대하고 있다.
(...) 그러나 사물은 완전히 뜻을 안 뒤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받아들인 후에 점차로 그 뜻을 이해해가는 수용 방식도 있는 것이다. 번역어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유사 이래 일본인이 한자를 사용하여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여온 것도 그와 같은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pp.190
오쿠무라 츠네야는 ...즉 '彼'라는 새로운 말은 이미 존재하던 어떤 말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공백이었던 곳에 등장하여 주격과 소유격을 충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
아마도 일본의 지식인 대다수가 이 의견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彼'라는 번역어는 '공백'을 베운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말로 침입해 온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부분부터는 발췌가 아닌 내 임의적 요약임

일본어에는 원래 주어를 밝히지 않는 표현을 많이 쓰고, 그러한 표현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따라서 쓸데없는 말로 침입한 것이라는 뜻.
그런데 일본 글 안에도 점차 '彼'나 '彼女'라는 말이 침입하면서 행위의 주체를 밝히는 문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he나 she같이 대명사로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그'라는 표현 자체가 1인칭의 고유명사화 되었다는 점이다.
 
1) 원래 '彼'는 약간의 은어조, 경멸조로 쓰는 지칭이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게도 쓰였다. 彼女는 유녀(창녀)라는 뜻으로도 쓰임.
2) 그런데 he와 she의 번역어로 쓰이기 시작한다
3) 한편 타야마 카타이의 소설에서는 1인칭 고유명사로 쓰이기도 하고, 현재 일상 회화에서는 애인이나 보이프렌드, 걸프렌드를 가리킬때 쓰이고 있다.  (한국어에서의 '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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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09 13:43

    재밌겠네 ㅋㅋ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10 03:16 신고

      한번 읽어보셈 ㅋㅋ 별로 어려운 책도 아니고 챕터도 단어 하나별 한챕터라 한 단어에 20페이지 정도 들어온 에피소드들 적혀잇는 구성임 ㅋㅋㅋ

풀베개

2011. 3. 11. 07:08 from 책/발췌






풀베개

저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출판사
책세상 | 2005-04-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 일본 근대 문학의 혁신을 꿈꾸다, 나쓰메 소세키 일본 근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풀베개, 원제 草枕,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윤 옮김, 책세상, 2005
 


p.7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知)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 어려울 것이다.
 

 

p.72-75
 
"그 여자 얼굴은 괜찮지만 사실은 좀 돌았다는 뜻이죠"
"왜요?"
"왜라뇨, 손님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치광이라고 하는데요."
"그건 잘못 본것 같은데요"
"그렇지만 현재 증거가 있는 걸요. 그만두세요. 위험천만이지요"
"나는 염려 없지만 어떤 증거가 있지요?"
"이상한 얘긴데요. 그럼 천천히 담배라도 피우고 계십시오. 얘기해드릴테니, 머리를 감을까요?"
"머린 됐어요"
"비듬이나 털어드리죠"
 
...
 
"아니, 너무 덜렁거려서 전혀 얘기에 매듭을 못 짓겠는데, 그래서 그 중에 그만 반해가지고......"
"그 중이라니, 어느 중 말이요?"
"관해사에서 사무를 보던 중이......"
"사무 보는 중이건 주지건, 중은 아직 한 사람도 안나왔는데"
"그래요? 성미가 급해서 안된다니까. 제법 멋지게 생긴, 바람깨나 피울 듯한 중이었지만, 그놈이 글쎄 그 여자한테 반해가지고 편지를 했다지 뭡니까. 아니 잠깐만요. 말로 했던가? 아니야, 편지야, 편지가 틀림없어. 그러자, 이렇게, 어쩐지 얘기가 좀 이상한데. 아, 그렇지. 역시 그래. 그랬더니 그녀석이 깜짝 놀라 가지고...."
"누가 놀랐다는 거요?"
"여자죠."
"여자가 편지를 받고 놀랐다는 거지요?"
"그런데 놀랄 만한 여자라면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지만 말입니다. 놀랄 것 같지도 없지요."
"그럼 누가 놀랐다는 얘기요?"
"말한 쪽이죠."
"말하지 않았다면서요?"
"에이 답답해! 잘못됐어요. 편지를 받고 말이죠"
"그럼 역시 여자겠군요"
"아니죠. 남자죠"
"남자라면 그 중이겠지요?"
"예, 그 중입니다."
"중이 어째서 놀랐다는 거죠?"
"어째서라뇨? 본당에서 주지 스님하고 경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뛰어 들어와서, 으흐흐흐, 아무래도 돌았어요."
"어떻게 해서요?"
"그렇게 귀여우면 부처님 앞에서 같이 자자고, 다짜고짜 다이안 씨의 목에 매달렸지 뭡니까"
"그래요?"
"당황한 건 다이안이죠. 미치광이한테 편지질을 했다가 그런 창피를 당하고 말이죠. 그만 그날 밤 몰래 도망쳐서 죽어버리고...."
"죽었어요?"
"죽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살아 있을 순 없잖아요?"
"그건 알 수 없지요"
"그도 그렇군요. 상대가 미치광이라면 죽어도 신통할건 없으니까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르지요"
"엄청 재미있는 얘기다"
 


p. 148-149
 
세상은 집요하고, 혹독하고, 자질구레하고, 게다가 뻔뻔스럽고, 싫은 놈들로 꽉 차있다. 애초에 무엇 때문에 세상에 얼굴을 내놓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녀석도 있다. 속세의 바람을 맞는 면적이 많은 것이 무슨 명예인 것처럼 알고 있다. 오년이나 십년을 사람의 엉덩이에 탐정을 붙여서 사람이 뀌는 방귀를 계산하고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고는 남 앞에 나와서 너는 방귀를 몇번 뀌었다, 몇번 뀌었다 하며,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가르쳐준다. 면전에 대고 말한다면, 그것도 참고로 해서 들을 수 있지만, 뒤에다 대고 너는 방귀를 몇번 뀌었다, 몇번 뀌었다 한다. 시끄럽다고 하면 더 한다. 그만하라고 하면 더 한다. 알았다고 해도 방귀를 몇번 뀌었다, 뀌었다 한다. 그러고는 그것이 처세하는 방침이라고 한다. 방침은 사람마다 제멋대로다. 다만 뀌었다 뀌었다 떠들지 말고 말없이 방침을 세우면 된다. 남에게 방해가 되는 방침은 그만두는 것이 예의다. 다른 사람의 방해가 되지 않으면 방침이 서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쪽에서도 방귀를 뀌는 것을, 이쪽의 방침으로 삼을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도 운이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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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저자
하영선, 최정운, 신욱희, 김영호, 장인성 지음
출판사
창비 | 2009-04-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한반도의 전통질서가 19세기 서양의 근대질서를 만나면서 한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형성사, 하영선 외 지음, 창비, 2009

 

pp 115-116

일제강점기를 통해 서구문물의 도입에 앞장섰던 우리의 지식인들, 특히 문학가들은 단순히 순수문학을 즐기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두운 시대에 번민하는 사상가들이었고, 이들이 자임했던 일은 우리 민족의 새로운 내면을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이들의 내면이란 단순히 고요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그런 내면이 아니라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의 주체가 될 그런 내면이었다. (...)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을 온몸이 무기인 투사로 만들었고, 결국 새롭게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은 언젠가는 벌어져야 하는 일제와의 마지막 투쟁을 위해 제작한 신무기들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통해 만들어진 우리 민족의 전사들은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바로 우리의 주체성 안에는 이성(理性, reason), 근대 서구의 이성이라는 핵심 부품이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우리의 근대문학가들은 낭만주의, 자연주의, 현실주의를 막론하고, 서구문명에서 정열, 욕망, 본능 등은 엄청나게 도입했지만 서구의 이성을 도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임꺽정은 주체성의 구조 내부에서 이성의 자리를 저항의 본능이 대체하고 있다. (...) 춘원 주인공들의 경우는 이성이 절대 없지 않았다. 그의 <유정>의 주인공 최석은 불타는 불륜의 애욕을 그의 윤리적 이성으로 억제하였고, 그는 이 갈등에서 탈진하여 사랑과 이성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 그의 이성이란 내면적 양심(良心, conscience)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윤리, 더 직접적으로는 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자로서의 체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기통제에 불과했다. (...) 이러한 이성의 부재는 춘원과 벽초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고, 이 세대들에게 특유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사회에서나 식민지 조선에서나 개인의 양심적 판단이란 위험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성이란 오직 조국, 민족 또는 가족 등의 집단에 맡겨야 하는 것이었다.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은 욕망의 주체로서 폭력의 주체로서만 개인화되어가고 있었다.

 

정치학과 사회학, 국문학까지 만나는 지점. 흥미롭다


 

p 370

신채호 또한 러시아 망명시절인 1913년 김규식에게서 영어를 배웠는데, 'neighbor'를 '네이 그후 바우어'로 읽는 영어실력임에도 칼라일의 <영웅숭배론>과 에드버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원문으로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윤재 <단재 신채호의 국권회복을 향한 사상과 행동>, 대전대학교 지역협력연구원 엮음 <단재 신채호의 현대적 조명> 23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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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사용후기

2011. 1. 7. 07:10 from 책/발췌




뉴라이트 사용후기: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

저자
한윤형 지음
출판사
개마고원 | 2009-08-0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1세대 역사학에 던지는, 3세대 철학도의 도발적 문제제기‘역사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뉴라이트 사용후기, 한윤형, 2009, 개마고원
 
 
 
pp.83-84
 
상식수준에서 얘기하자면 유럽의 산업혁명 때 경제성장률이 1.1%다. 당시 경제성장률이 1.1%였는지 1.4%였는지가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 1%대의 경제성장률을 가지고 혁명적 성장이라고 이야기들 한다. (…)
 
물론 후발주자들은 좀더 빨리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1965년에서 1990년 사이의 연평균 1인당 GNP 성장률을 보자. 앞에서 말한 세계은행의 자료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0.2%, 중동 1.8%, 라틴아메리카 1.8%, 남아시아 1.9%, 선진국들이 2.4%, 그리고 세계가 찬탄하는 저 동아시아의 기적 같은 경제성장률이 무려 4.6%였다. 어떤 자료를 찾아봐도 3%대 후반의 성장률이 별거 아니라는 얘기는 성립할 수가 없다. 더구나 한두해도 아니고 35년간의 평균성장률이 그정도라면 ‘매우 높은’ 수치라고 봐야 한다. 여기다 대고 일제 통치가 성장을 도와준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억누르고 가로막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면,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다.
 
 
 

 
 
pp.96-99
 
어쨌든 교과서 포럼의 ‘대안 교과서’에 실린 세 역사학자들의 추천의 글을 읽어보자. 이 짧은 글들이야말로 ‘대안 교과서’가 현행 교과서에 대항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관점을 명확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역사는 민족을 주체로 쓰인 상상의 역사였다. 이 책의 집필자들은 그 민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 대신 자유, 인권, 자애를 본성으로 하는 보통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그렇게 다시 쓰인 한국의 근현대사가 이 책이다. 독자는 관점이 달라지만 역사가 얼마나 혁명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실감하게 될 것이다. – 박지향,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
 
그래서 나는 ‘대안 교과서’를 식민지기와 건국기로 나누어서 평가한다. ‘대안 교과서’의 식민지기 기술은, 차후에 다루게 될 하나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존중할 만하며 기존의 교과서가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반면 대한민국 건국기에 대한 서술은, 이 책이 기존의 책과 다른 사관을 취하면서 얻게 된 장점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미화의 교과서’로 떨어지고 만다고 본다. ‘대안 교과서’는 반대자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매국노의 책이기는커녕 너무 애국심이 강해서 탈이다.
 
 
 

 
 
pp. 140-144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면과 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하자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는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행동이며 그런 어른들에 대한 모독이다. 만일 그 잣대로 보면 저도 학병을 갔다 왔고, 창씨개명을 했고, 학교 다닐 때 신사참배도 하였으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라며 친일파 선정 기준을 비판하였다.
 
(…)
 
이후 김 추기경이 친일파라는 근거 없는 음해성 자료가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이에 대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례적인 해명자료를 통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이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히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한홍구는 친일파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된 예 중 하나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꼽았다. 이 신문들이 ‘천황 폐하’를 찬양하는 기사를 게재한데 대해,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에게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라면서, “일제 말에 폐간당했던 두 신문이 해방 직후 복간할 때 두 신문의 친일행위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전 국민의 80%가량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던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일제잔재의 철저한 청산을 원하면서도, 현재 우리의 감각에 비해 구체적인 친일행위의 범주에 대해 상대적으로 좀더 관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한홍구, 대한민국사 1)고 코멘트한다.
 
 
 

 
 
p. 153
 
공창제 발언은 이영훈이 아니라 송영길이 했다. 이영훈은 토론회에서 거듭 위안부 희생자들을 ‘성노예’라고 언급했는데, 위안소가 공창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표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만일 오해가 있었다면 누군가 나서서 풀어줘야 했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고, 진중권이나 홍기빈 등 평소에 굉장히 날카로운 논리를 보여주던 진보 진영의 비평가들도 <시사저널>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통해 사실상 ‘오마이뉴스 프레임’에 가담했다.
 
 
 

 
 
p. 183
 
비록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지만, 뉴라이트가 민족을 비판하면서 할 말이 ‘민족이란건 원래 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근대 문물을 숭상하는 뉴라이트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좌파나 아나키스트나 할 수 있는 소리다. 근대적 민족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는 민족주의자와, 공화국 시민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탈민족주의자가 논쟁을 벌이는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다.
 
 
 

 
 
pp. 201-203
 
해외에 나가 일본 지도층에게 폭탄을 던진 한국의 독립투사들은 자신이 이국에 있던 30년 동안 사람들이 전혀 다른 질서에 적응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 중일전쟁 이후의 중국인들이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인들이 들이미는 것과 같은 잣대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처단한다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걸려드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거다. (…)

조선 민중은 그들을 열광적인 환호로 맞이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식민지 조선의 비극이다. (…) 그들은 바뀐 세상에서 그렇게 분열된 의식을 지닌채 열렬히 독립운동가들을 찬양했다. 사람들은 영웅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두가지 상이한,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하나의 입장이 관철된다. (…)
 
하나는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 친일파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지도자와 민중들은 어차피 도찐개찐의 친일파이니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의 죄를 용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숙청론과 속죄론이 맞부딪혔을 때 누가 이길지는 매우 자명하다. 죄의식이 아무리 크다해도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충성을 통한 속죄 속에서 ‘죄사함’ 받은 이들은 이제 다른이들을 단죄하는 데 골몰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기독교적 죄의식 속에서 건국된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식민지기 조선의 근대화가 기독교와 큰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유비는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수 없다.

 


 
pp.325-326
 
교과서포럼은 친일파 청산을 논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이 ‘살부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나는 한국 근현대사를 ‘고아의식’이란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것은 작고한 정치학자 전인권이 그의 대표적인 저서 <남자의 탄생>에서 사용한 말을 차용한 것이다. 전인권은 이렇게 말한다.
 
 
 
프로이트의 아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가 세운 터전 위에 자신이 미래를 세워나가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일상적인 전투 속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만, 그 패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욕망을 우회적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나 홍길동과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살해하지도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슬쩍 제사상의 조상반열에 올려놓음으로써 부자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거부하고 떠났던 것은 일견 남자답고 씩씩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버지와 일상적인 전투를 회피하는 비겁한 행동일 수도 있다.
 
그 비겁함은 내가 ‘새로운 율도국’을 건설해봤자 나의 위치가 아버지로 변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결국 나는 아버지와 똑 같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비겁함이었다.
 
 
 
정치학자가 ‘한국 남자’를 이렇게 탐구하게 된 이유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탐구를 통해 한국 정치의 문제를 해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특별히 전인권은 이 구절에 다음의 주석을 달아놓는다.
 
 
 
비겁하게 아버지를 살해하는 현상은 대한민국이 민주화된 이후의 정권교체 과정에서도 계속 반복되었다. 즉, 신임 대통령이나 유력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마치 홍길동이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하듯 전임 대통령을 전면 부정하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렇게 전임 대통령을 단죄한 신임 대통령이 물러날 때 보면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나 장점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채, 전임 대통령과 비슷한 과오를 범한 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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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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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레,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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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감상문


 
 
19세기 미국의 한 지식인이 월든이란 이름의 호숫가에 직접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일을 쓴 이야기. 책 겉표지의 제목 위엔 ‘자연의 예찬과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불멸의 책’이라고 적혀있고, ‘법정 스님이 가장 사랑한 책’이라는 수식어구가 추가되어 있다. 역자는 <월든>의 저자인 소로우가 19세기의 인물이지만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며[각주:1] “아마도 최초의 녹색 서적을 저술한 최초의 환경보호론자이었을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각주:2]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는 녹색이나 생태, 환경의 테마로 이 책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 책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되었을 때 단지 생태주의나 문명 비판, 무소유 정신 정도로만 이 책을 소개한다면 여타 다른 종류의 책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물론 그런 내용의 책이 19세기에 쓰였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19세기에 쓰인 책이 21세기의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생태주의의 관점으로만 설명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태와 환경을, 그리고 시대상을 넘어선 가치가 담겨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려한 글을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거리두기’에 능한지 금세 느낄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시대상의 편견에 함몰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탁월한 관찰력과 직관으로 사람들의 모순을 꼬집어낸다. 아니 꼬집는다기보단 헤집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나 또한 소로우의 비판에서 자유로운 바는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신이 나서 그의 내러티브에 빠져들 때가 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토스타인 베블렌의 저서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할지도. 이런 부분에서 그는 훌륭한 문화인류학자이자 사회학자의 소임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19세기 미국 사회 사람들의 생활상을 마치 눈에 펼쳐지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그 모습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고 비합리적인 전근대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 바로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의 배경이 되는 시대다. 저자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미개인’ ‘인디언’ ‘철도’ ‘농장’ ‘노예’ ‘바느질하는 부인들’ 등의 어휘는 이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증거다. “채소엔 뼈가 될 성분이 없기 때문에, 채소만 먹고는 살수 없다”는 한 농부의 충고 아닌 충고에 소로우가 “그런 농부도 꼬박 풀만 먹고 자란 소가 쟁기를 끌도록 하는데 온 힘을 바치고 있다”[각주:3]고 꼬집는 부분은 지금으로선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치부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 그 농부와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는 이는 어지간해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로우는 19세기 주변 사람들의 생활상과 모순을 비판하고 있는데도 현재 우리에게 그의 비판이 이해하고 공감하기 쉽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그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느끼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역시 그가 어떤 특수한 개별 행위를 놓고 꼬집은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통찰력이 2세기를 넘어서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통찰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단지 소로우가 시대를 앞선 천재였을 뿐인가? 이 두 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본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며 그 키워드는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가 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미리 하자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세계시민적 사고'이며,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소로우는 당대에 통용되던 속담에서부터 자연과학적 지식, 성서나 그리스 신화와 철학, 고대 중동의 역사나 로마 역사,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승지식은 물론 중국과 인도의 철학까지 풍부하게 인용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다. 그가 기원전 5세기의 힌두 경전인<바가바드기타>의 철학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논어는 물론 맹자와 대학까지 인용하는 것은 적잖이 놀라웠다.[각주:4]

 
 
그는 가까운 곳에서도 얼마든지 세계의 고전양서를 구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기껏 <아동독본>이나 <리틀 리딩>수준의 이야기책과 최신 가십거리를 다루는 신문을 읽는 데에 그치는 주변 이웃들의 독서 경향을 비판한다.[각주:5]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 민족 말고도 경전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각주:6],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각주:7] 등의 이야기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 보다 넓은 지혜에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콩코드 교외에 있는 한 고독한 농부의 종교적 체험과 믿음이 수천 년 전에 조로아스터에게도 있었고, 그 농부와 똑같은 길을 걸었고 똑같은 체험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소로우는 조로아스터가 현인(賢人)이어서 그 경험이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콩코드의 농부와는 달리 하나의 종교를 창시할 수 있었다고, 보편성의 자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각주:8] 이미 그는 전 지구적, 전 세계적 수준의 보편성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 연표를 보면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토록 풍부한 동서고금의 이야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외 곳곳을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평생의 대부분을 고향근처에서 지내는 등 미국 땅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대서양에 해저전신을 가설하기를 바랐던 당시의 교통 통신수준[각주:9]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관점을 지녔다는 것은 그의 생애 자체가 현대적이었다는 증거다. 지금과 같은 유비쿼터스 환경이 없었음에도, 미국의 구석에서 평생을 보낸 이가 200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공간을 넘어 지금 한국의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러나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알아도 저서를 읽지 않는 것은 플라톤이 옆집에 사는 이웃임에도 대화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각주:10]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소로우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소로우가 현대적 감각을 가진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서, 그가 다른 필부들과 달리 자유를 외치고 세계 보편적 사고를 지녔다고 해서, 그를 단순히 독립적인 인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질문 -소로우의 통찰력은 독립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이유다. 그는 미국인이며, 미국적 사회 풍토에서 등장한 인물임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로우 자신은 주변 이웃들(미국인)에게 쓴 소리를 퍼부어댔지만, 당시 미국에는 그와 같이 치열하게 고민하던 일군의 지식인들이 존재했으며, 미국은 그러한 지식인들을 배출할 수 있는 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미국이 현대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되는 원동력은 미국 사회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이 시대의 미국 사회를 보고는 유럽으로 돌아가서 감탄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2010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떤가. 1990년대 문민정부에서 세계화와 지구촌을 주창한 이래로, 2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고 그때에 비해 세계화란 용어는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구촌이란 단어는 이제는 굳이 언급해봐야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세계시민의식은 낙제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에서 사회시간에 문화나 역사 부문에서 세계적(세계사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대비하여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그렇지만 진정 우리에게 세계적 보편성의 인식과 존중이 존재하는지는 의문이다. 교과서들은 하나같이 세계적 보편성에 함몰되어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게(?) 우리의 고유한 특수성을 주체적으로 지키자고 강조하며 마무리하는데, 조금 쓸데없는 걱정처럼 느껴진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모순과 부조리라 할지라도 ‘현실적’, ‘한국적’ 따위의 수식어로 고수되며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특수성(Local Rule)이 너무나도 강력한 권위를 지녀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합리성은 비현실적인 이상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어떻게 중․고등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신체(머리카락)를 함부로 억압적으로 규율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질 수 있는가. 어떤 교사가 아침에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규율하고 나서 교실에선 아무 거리낌없이 천부인권을 가르친다고 상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2010년 현재까지도 두발규제 논란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논란이라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자 블랙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최근 저 너머의 국가에서 독재 권력이 3대째 세습되는 것에 대해 ‘내정간섭’이라며 애써 판단을 유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한 정치집단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히틀러가 침략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내정간섭이라며 판단을 유보했을까? 세계사적 보편성의 자각이 있다면, 그렇게 비상식적인 우호와 궤변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가르치자는 따위의 수준 낮은 논란을 수시로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세계화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왜곡된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정신(문화)적 과제는 세계 보편성의 인정과 자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고향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세계를 느끼고 가졌던 한 미국인이, 팝송을 흥얼거리고 외국어를 배우며 해외여행을 수시로 다닐 수 있지만 세계적 시야로 상상․사고하지 못하는 일군의 한국인들의 사회에 주는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아닐까.
 
 






  1. H. D. Thoreau, 「월든」, 강승영 옮김, 이레, 2004, p. 479 [본문으로]
  2. 위의 책, p. 481 [본문으로]
  3. 위의 책, p. 19 [본문으로]
  4. 위의 책, p.137, p.315, p.313 [본문으로]
  5. 위의 책, pp. 153-154 [본문으로]
  6. 위의 책, p. 154 [본문으로]
  7. 위의 책, pp. 155-156 [본문으로]
  8. 위의 책, p. 156 [본문으로]
  9. 위의 책, p. 77 [본문으로]
  10.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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