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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7 학문의 권장
  2. 2010.11.06 소설의 이론
  3. 2010.07.21 산시로
  4. 2010.07.17 예수의 생애 (2)

학문의 권장

2010. 11. 7. 07:11 from 책/발췌






학문의 권장(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0)

저자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출판사
소화 | 2003-02-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 책은 서양사정, 문명론의 개략과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의 3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학문의 권장, 후쿠자와 유키치 지음, 1873, 남상영/사사가와 고이치 옮김, 소화, 2003


pp.32-33

서양 속담에 어리석은 백성들 위에는 가혹한 정부가 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부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백성들 위에는 가혹한 정부가 있고, 어진 백성들 위에는 좋은 정부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일본에도 그와 같은 인민들이 있으므로 그와 같은 정부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인민들의 덕의가 지금보다 더 쇠퇴해져 무학 문맹하게 된다면 정부의 법은 지금보다 더욱 엄해질 것이며 만약 인민들이 다 학문을 열심히 하여 사물의 이치를 알고 문명을 잘 받아들인다면 정부의 법도 관대해질 것이다. 법의 가혹함과 관대함은 오직 인민들에게 덕의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어느 누가 가혹한 정치를 좋아하며 좋은 정치를 싫다고 하겠는가? 어느 누가 자기 나라의 부강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 세상 어디에 외국의 업신여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인 것이다.



p. 77

인민이 정부에 복종한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힘이 있었다면 그들은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를 두려워하여 겉으로만 복종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부는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지혜롭고 민첩하게 일들을 처리하고 있어 늦어지는 것이 없다.



pp. 103-105

예부터 일본에는 적과 싸우다 전사하는 사람 또는 할복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에 대해 충신이며 의사라고 평판은 높지만 그들이 몸을 바친 이유를 보면 양쪽의 주인들이 일으킨 정권을 다투는 전쟁에 나간 사람이든가 또는 주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등 겉으로는 훌륭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주인을 위해서라든가 주인에게 면목이 없다며 오직 자신의 생명 하나만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해서 도리를 몰라 생기는 일이다. 문명의 대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생명을 바칠 곳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문명이란 사람들이 지덕을 쌓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으며 나 또한 남에게 해를 입지 않고 각자 자신의 권리를 확립하여 세상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전쟁이나 주인의 원수를 갚아 체면이 유지되어 세상의 문명이 발전하고 상업도 공업도 번창하며 세상 사람들도 안전하고 번영된 삶을 살게 된다면 전쟁에 나가 전사하는 것도 적에게 원수를 갚는 것도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런 목적에서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충신들에게도 그런 목적은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 상황에서 주인을 뵐 면목이 없다고 하여 취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주인에게 면목이 없다고 하여 취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주인에게 면목이 없다고 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충신이며 의사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곤스케가 주인의 심부름을 가다가 금 한 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주인을 뵐 면목이 없다고 나뭇가지에 훈도시를 걸고 목을 매달아 죽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충직한 하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의 그 마음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련하다. 심부름을 간 채 돌아오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오랫동안 영웅으로 받들며 눈시울을 적셔야 할 것이다. 주인에게 위탁받은 금 한 냥을 도중에서 잃고 군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고금의 충신의사에 비해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의 성실한 충성은 오랫동안 세상에 빛날 만하며 그의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전해질 만하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박정하게도 곤스케를 경멸하며 그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지도 않고 궁전을 지어 제사도 지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곤스케의 죽음은 단지 한 냥의 금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이므로 그것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일의 경중은 액수의 많고 젊음이나 사람 수가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명에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에 따라 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충신들이 만 명의 적을 토벌하고 전사한 것이나 곤스케가 한 냥의 금 때문에 목숨을 버린 것이나 그들의 죽음은 다 문명의 이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그것의 경중을 비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 충신들도 곤스케도 목숨을 버릴 때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을 순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p. 118

그러나 자식을 낳고 자식을 키우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금수도 다 똑같이 새끼를 낳아 키운다. 다만 사람이 금수와 다른 것은 자식에게 의복을 입히고 교육을 시키며 인간교제society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부모들이 자식은 많이 낳으나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몸은 방탕한 생활을 하여 자식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며 가문을 더럽히고 재산을 탕진하여 빈곤한 가정이 되어 의지가 점차 쇠퇴하고 재산을 탕진하게 되면 방탕과 옹고집과 어리석음으로 변하여 자식에게 효행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한다. 그런 마음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얼마나 철면피이기에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식의 재산을 탐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며 자식부부를 시시콜콜 간섭하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생각을 옳다고 하며 자식의 의견은 입 밖에도 낼 수 없게 한다. …



pp. 142-143

예를 들면 10세 전후의 자식에게는 일일이 그 아이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는다. …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명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모 자식 간의 교제를 인간교제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지만 거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부모 자식 간의 교제는 지혜가 발달한 부모와 10살 정도 된 자신이 낳은 자식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으로 타인과 자식과는 그런 관계가 성립되기 어렵다. 가령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도 20살이 넘으면 점차 그러한 상하 관계를 고쳐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 성년이 된 남남과의 관계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도저히 그런 관계가 성립이 되어 교제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 그런데 하나의 국가나 하나의 마을 또는 정부나 회사 등의 인간교제는 모두가 성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타인과 타인의 교제이다. 그들 사이의 교제에 부모와 자식 간의 교제를 적용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실현됐을 때의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해 그러한 목표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명분이 생기고 전제정치가 행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명분은 악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면 정부와 인민은 원래 육친간의 연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 타인의 관계이다. 타인간의 관계는 실제의 정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반드시 규칙과 약속을 정해놓고 서로간에 그것을 철저히 지키고 의견의 차이가 나면 서로 합치점을 찾아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 간다. 이것이 곧 국법이 생긴 이유이다. … 그러나 믿을 수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전제적인 운영 방식이다. 주인과 그들과는 완전한 남남 사이이다. 그들에게 장사의 이익에 대한 배분을 약속하지 않고 자기 자식과 같이 취급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상하귀천의 명분이 옳다고 주장하며 전제적인 권위를 행사하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 사기와 술책들이 만연한 것도 그러한 해독 때문이다. 그러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선군자라고 한다.



p. 154

학문이란 단지 독서를 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학문의 중요성은 활용에 있다. 활용하지 않는 학문은 무학과 같다. …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목적은 독서를 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활동에 있다. 그 활동을 통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의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 인간의 활동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두 가지가 있으며 그 어느쪽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 안으로는 끊임없이 지식을 쌓아야 하고, 밖으로는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접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p. 158

현재 일본의 학교에 대해 평할 때 이 학교의 기풍은 이렇고 저 학교의 규칙은 이렇다는 둥 학부형들은 오직 학교의 기풍이나 규칙에 대해서만 걱정한다. … 그러나 나는 그것을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학교의 명예는 학과 수준의 고상함과 가르치는 방법의 우수성, 인물들의 품행의 바람, 토론의 수준이 저속하지 않음에 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낮은 수준의 학교와 비교하지 말고 세계 일류의 학교와 비교하여 자기 학교의 장단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한 나라의 상황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 이와 같이 인도의 문과 터키의 무도 그 나라의 문명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그 나라 인민의 생각이 국내에만 머물러 그것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자국의 문화나 국력의 일부분만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여 나라의 발전을 위해 토론하는 일도 없고 정당을 만드는 일도 하지 않았으며 승패와 영욕이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잊고 마냥 태평하게 세월을 보내면서 왕족들이 형제간에 권력다툼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는 사이에 외국의 상권이 국내에 침투되어 나라를 잃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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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이론

2010. 11. 6. 07:13 from 책/발췌






소설의 이론

저자
게오르크 루카치 지음
출판사
문예출판사 | 2007-07-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문학론과 미학, 철학과 정치사상 등 여러 영역에 걸친 방대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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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이론, 게오르그 루카치, 1914/5, 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5
 

p.29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청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그 까닭은 불이 모든 빛의 영혼이며, 또 모든 불은 빛 속에 감싸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영혼의 모든 행위는 의미로 가득 차게 되고, 또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
 
또 이때는 내면성이라는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일체의 외부적 세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립되는 타자도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모험을 찾아 길을 떠나고 또 갖가지 모험을 끝까지 헤쳐나가지만, 정작 찾는 일에 수반되는 참된 고통과 발견의 진정한 위험을 알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영혼은 결코 자신을 운명의 장난에 내맡기는 법이 없다. 다시 말해 영혼은 자신을 잃을 수도 있고, 또 그럴 경우에 자기 자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거나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사시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p.76
 
서사시가 그 자체로 완결된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한다면, 소설은 형상화하면서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찾아내어 이를 구성하고자 한다. 객관적 대상의 주어진 구조는(다시 말해 찾는다는 행위는 객관적인 삶의 전체성이나 이러한 전체성이 주체에 대해 갖는 관계가 그 자체로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체가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표현이다), 형식을 만들어 낼 생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

즉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찾는 자인 것이다. 찾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목표나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직접적으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를 바꾸어 표현하면, 만약 그러한 목표와 길이 심리적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면 그것은 범죄가 되거나 광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를 긍정적인 영웅정신과 구분짓고 또 광기를 삶을 지배하는 지혜와 구분짓는 경계선은, 비록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과가 점차 분명해지는 절망적인 혼돈과 미로의 상태 속에서 일상적인 현실과는 구별된다고 하더라도, 유동적이고 단순힌 심리적인 경계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서사시와 비극은 범죄도 모르고 광기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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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2010. 7. 21. 07:17 from 책/발췌





산시로

저자
나츠메 소오세키 지음
출판사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 2005-03-2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산시로는 분명히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움직이는 찰나를 의식했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산시로(三四郞), 나츠메 소세키, 최재철 옮김,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p.18
 
 
 
“서양인은 참 아름답군!” 하고 말했다. 산시로는 별달리 대답도 나오지 않아 그냥 “예”라고 되받고 웃고 있었다. 그러자 수염기른 남자는, “우린 서로가 불쌍하군!” 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이렇게 볼품없어서는, 아무리 러일전쟁에 이겨 일등국이 되어서도 소용없지요. 뭣보다 건물을 봐도 정원을 봐도 어느 것이나 볼품없는 얼굴과 비슷한데, 도쿄가 처음이면 아직 후지산을 본 적이 없겠지. 이제 곧 보일 테니 잘 봐요. 그게 일본 제일의 명물이요, 그것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그런데 후지산은 천연자원으로 옛날부터 있던 것이니까 의미가 없지. 우리들이 만든 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또 싱글싱글 웃고 있다. 산시로는 러일전쟁 이후 이런 사람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정말이지 일본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제부터 일본도 점점 발전하겠지요”라고 변호했다. 그러자 그남자는 태연하게 “망하고 말거요”라고 말했다. –쿠마모토에서 이런 말을 하면 곧장 얻어터진다. 심하면 역적 취급을 받는다. 산시로는 머릿속 어느 구석에도 이런 사상을 집어넣을 여유는 없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어리다고 사람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했다. 남자는 아까처럼 싱글싱글 웃고있다. 그러면서 말씨는 어디까지나 침착하다. 아무래도 짐작이 가지 않아 상대하기를 그만두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쿠마모토보다 도쿄는 넓지. 도쿄보다 일본은 넓고, 일본보다…” 하고 잠시 말을 멈추고 산시로 얼굴을 쳐다보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일본보다 머릿속이 넓겠지요.”라고 말했다. “얽매이면 안돼. 아무리 일본을 위한다고 해도 지나친 편애는 오히려 해를 미치게 될 따름이지.” 이 말을 들었을 때 산시로는 진실로 쿠마모토를 떠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쿠마모토에 있던 때의 자신은 매우 비겁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p.29
 
 
 
“전차는 시끄럽지 않나요?” 라고 또 물었다. 산시로는 시끄럽다기보다 무서울 정도였으나, 그냥 “그래요”하고 대답해뒀다. 그러자 노노미야군은 “나도 시끄러워”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혀 시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난 차장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혼자서 자유로이 갈아탈 수가 없어. 최근 2, 3년 동안 너무 늘어나서 말이오. 편리해져서 오히려 곤란해. 나의 학문과 똑 같은 거요.” 라며 웃었다. 학기초라서 새 고등학교 모자를 쓴 학생들이 많이 지나간다. 노노미야군은 유쾌한 듯이 이 무리를 보고 있다. “낯선 얼굴들이 꽤 보이는군” 하고 말한다. “젊은이는 활기가 있어 좋아. 그런데 올해 몇살이지?”라고 물었다. 산시로는 숙박부에 적은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럼 나보다 일곱살 정도 아래군. 7년이면 인간은 왠만한 일을 할수있지. 그러나 세월은 빠른 거라서 말이오. 7년쯤이야 금방이야.”라고 말한다. 어느쪽이 진정인지 산시로는 알 수 없었다. 네거리 부근에 오자, 좌우에 책방과 잡지 파는 곳이 많이 있다. 읽다가는 사지도 않고 가버린다. 노노미야군은 “모두 뻔뻔스럽군”하며 웃고 있다. 그런 당사자도「태양」지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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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2010. 7. 17. 07:18 from 책/발췌

 

 

 



예수의 생애

저자
엔도 슈사쿠 지음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 2003-09-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예수가 걸어간 인생의 길을 폭넓은 신학적 지식과 깊은 신앙, 상...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예수의 생애, 엔도 슈사쿠, 가톨릭출판사


 
p.58-60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창녀는 막달라나 그 부근에 사는 가난한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겼고, 남자들은 그녀를 경멸하면서 돈을 건넸을 것이다.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그녀는 어둠 속에 공허한 눈길을 던진 채 꼼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예수가 식사를 하는 집이 바리사이파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도 집안에 들어갈 때 하인들로부터 제지당했을 것이다.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창녀 같은 사람은 말을 거는 것조차 피해야 하는 천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구약의 세계에서 그녀들은 종종 예언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하인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들어간 자신을 놀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예수 앞까지 곧장 걸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눈물로써 자신의 애처로운 처지를 호소했다.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라는 간결한 표현 속에서 그녀의 비참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이때 한 말은 성서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이다. “이 여자는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이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랑을 베푼 사람은 많이 용서받는다…
 

 
 
p.62
 
‘위로 이야기’가 ‘기적 이야기’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적 이야기’가 갈릴래아 지방에 남아있던 예수의 전승을 모아 쓴 것인데 반해, ‘위로 이야기’는 아마도 목격자인 제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위로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애환을 못본체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사막의 예언자들은 고고한 자세로 훌륭한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는 갈릴래아의 빈곤한 마을의 불구자나 병자와 함께하며 창녀나 세리처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이들도 위로했다. 호숫가의 마을들은 보잘것없고 비참했지만 예수에게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의 모든 사람의 애환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처럼 사람들의 애환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위로 이야기’가 지닌 사실성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때 그는 또 하나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사랑의 무력함이 그것이다. 그는 불행한 이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사랑의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배반할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인간은 결국 효과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은 치유되기를, 절름발이는 걷게 되기를, 맹인은 볼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현실세계에서의 효과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행위이다. 여기에 예수의 고뇌가 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라고 그때 그는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 이야기’의 배후에는 이러한 에수의 고뇌가 숨어 있다. ‘기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행했는가 하는 통속적인 의문보다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결국은 사랑이 아니라 징표와 기적밖에 구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하였는지를…
 
 

p.124
 
가정적인 언니 마르타에 비해 적극적인 성격인 마리아는 갑자기 값비싼 나르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꺼내 아낌없이 예수의 발에 부었다. 그녀의 이 행동은 예수를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녀는 당시 집을 에워싸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메시아시여!”라고 외치는 순례자들의 열띤 함성에 맞추어 행동했던 것이다. 확실히 메시아라는 말에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자들은 마리아가 한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아마 감동했을 것이다. 스승이 이렇게까지 환대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유다 이스가리옷이 입을 열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차고, 사람들이 감동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유다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경멸하는 듯한 말투이다. 그 혼자 제정신인 듯했다. 유다는 물론 마리아가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것을 유다의 위선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말에는 한층 깊은 의미가 있다. 예수는 모두가 요구하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유다는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아직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때, 유사 이스가리옷만이 스승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분심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이때 예수에게 반발한 것이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이 말에는 현실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심리가 드러나 있다. 즉, ‘스승이여, 당신은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은 현실적으로 별로 도움이 안됩니다. 당신은 비참한 이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고자 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당장 삼백 데나리온의 돈을 필요로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 유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
 
 


 
p.147
 
…먼저 이 최후의 만찬의 상황을 재현시켜 보자. 집안에서는 식탁을 중심으로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않아 있고, 집 밖에는 예수에게 기대를 건 군중이 기다리고 있다. … 루가복음서에 의하면, 이때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흥분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제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시고…” 군중과 마찬가지로 예수에게 지상적 메시아의 꿈을 품고 있던 제자들은 일이 잘 되었을 경우에 누가 예수의 뒤를 이을 공로자인지를 서로 겨루었던 것이다.
 
… 이때 유다 이스가리옷은 군중을 대표해서 예수에게 반발했을 것이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이 가혹한 현실에 하느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을 볼때는 하느님의 침묵이나 분노밖에 느낄수 없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은 사랑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사랑보다도 당장 현실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찾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유다의 심리는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반발로 스승의 굳은 결의를 바꿀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꾸짖기 위해서, 이제까지 스승을 따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예수는 유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일을 어서 하여라”
 
이 말은 증오에 찬 말이 아니었다. 예수는 유다의 고통도 알고 있었다. 그는 비참한 처지의 괴로워하는 모든 이의 동반자가 되고자 했는데, 그 가운데는 유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p.158
 
유다 이스가리옷은 예수를 에워싼 성전 경비원들과 가야파 관저로 돌아왔다. 그는 아마 관저에서 열린 예수 재판에 증인으로서 입회했을 것이다. 마태오복음서를 보면, 유다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라며 은전 서른닢을 되돌려주려고 했다고 쓰여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예수가 사형에 처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가, 아니면 자신은 예수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게쎄마니로 경비원들을 안내하겠다고 했는데 가야파가 그 약속을 깼던가 둘중 하나이다.
 
그는 돈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가 매맞고 피흘리는 모습을 보자 그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미움, 자기변명, 자기혐오 등의 감정을 맛보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형으로 판결되자, 그는 자신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영원히 사람들로부터 멸시받을 것이다. 지금 예수가 맛보는 것을 자신은 영원히 맛보아야 한다. 그 불가사의한 상관관계를 유다는 이때 깨달았을 것이다.
 
그때 그는 분명히 예수의 존재 의미를 깨달았다. 복음서는 유다를 배신자, 불신앙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가 예수를 믿었다고 확신한다. 유다는 가야파에게 돈을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가야파는 이를 냉정하게 거부했다. 그는 은전 서른닢을 가야파 관저의 뜰에 내던지고, 성밖으로 나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 예수는 유다도 구원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다는 예수와 자신의 상관관계를 느낌으로써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고통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배신한 자에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사랑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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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어웅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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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25 03:50

    신곡에서는 아예 유다가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문받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던데, 나는 기독교에서 왜 이렇게 가룟유다가 폄하되는지 모르겠어. 유다가 만일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만찬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기독교의 핵심인 십자가에서의 보혈을 통한 구원도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여호와가 전지전능하다면, 유다의 배반이라는 인과관계도 직접 조종한 것 아닌가? 다시말해 유다의 배반도 결국 신에게 책임이 있는것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네. 만일 유다가 지옥에 있다면 십자가 보혈의 영광은 전부 신이 가져가고 애꿏은 유다만 신을 살해한 죄를 뒤집어 쓰게 된건데... 얼마나 삼위일체론이 기교적이고 허구적인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됨...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25 03:55 신고

      그런 점에서 저 책 158쪽의 내용은 참 현명하다고 느끼는 이야기야. 나는 유다도 예수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함.

      최근 미국의 한 목사가 예수/기독교 없이 가능한 구원을 이야기했지. 랍 벨 <사랑이 이긴다> 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