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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2011.08.30 05:53 from 책/발췌




감염된 언어

저자
고종석 지음
출판사
개마고원 | 1999-06-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기자를 지내고 제망매 등의 소설집을 낸 저자의 우리나라 언어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감염된 언어, 고종석, 개마고원, 1999



pp. 90-91
저자(복거일을 말함, 편집자 주)는 ‘열린 민족주의’의 예로 혁명기의 미국과 프랑스의 민족주의, 그리고 19세기 이래 약소민족의 민족주의를 든다. (...) 내 생각으로, 혁명 후의 미국과 프랑스를 자유롭게 한 것은 천부인권 사상이나 주권재민 사상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이념이었지, 민족주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19세기 20세기의 민족해방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족주의의 융성이 한 민족의 독립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독립을 얻은 민족의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한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강대국의 민족주의든 약소국의 민족주의든, 얼마나 자주 대외적 패권주의와 대내적 집단주의를 가져왔는가? 말하자면 개인으로서의 미국인, 개인으로서의 프랑스인, 개인으로서의 신생 독립국 시민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 설령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였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




p. 121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국어 순화’의 ‘순화’는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의 저 악명 높은 ‘순화교육’의 ‘순화’다. 실상 순결을 향한 집착, 즉 순화 충동은 흔히 죽임의 충동이다. 믿음의 순결성, 피의 순결성, 이념의 순결성에 대한 집착이 역사의 굽이굽이에 쌓아놓은 시체더미들을 잠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국어 순화’의 충동에 내재된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pp. 121-146
나는 여기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국어에 대해 취하는 세가지 태도를 검토하고 싶다. 그것은 독일형, 영국형, 일본형이라고 명명할 만한 것이다. 고유명사 대신 특징어를 집어넣는다면 폐쇄형, 개방형, 양방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특징들은 이 나라의 국민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이들이 자기들 언어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지칭할 뿐이다.
(...)
‘성실한 잣나무 협회’ ‘독일 애호협회’ ‘페그네시아 꽃 모임’ ‘엘베강 백조 교단’ 등의 향토적 이름들을 지닌 이 언어협회들이 수행한 언어운동 Sprachbewegung의 핵심은 ‘독일화’(Verdeutschung)였다. 즉 라틴어, 그리스어 같은 고전어와 특히 프랑스어에 깊이 침윤된 독일어 어휘를 순수하게 독일화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영국인들은 자기들 언어에 깊숙이 들어온 프랑스어를 배척하려 하지 않았다. 영어가 공용어가 된 뒤로도 여전히 궁중의 일부와 법정에서는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이런 너그러움의 이유(또는 결과?)가 되었다. (...)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프랑스어의 수혈이 영어에 계열이 다른 유의어군을 형성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원래의 앵글로색슨어가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어가 그 위를 덮어씌운 셈이어서 영어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무수한 쌍의 유의어를 갖게 됐다. (...)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언어 가운데 영어만큼 어휘가 풍부한 언어는 없는데,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영어가 기본적으로 외래어에 열려 있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이렇게 일본적인 것, 일본어적인 것의 특이함을 찾는 분위기의 반대편에는 외국문화와 외국언어에 대한 열광이 있다. 고대 이래의 무수한 한자어 수입도 그렇지만, 메이지 이래 일본어의 유럽어 수입은 비유럽권 언어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오늘날 일본어 문장에는 외래어를 표기하는 가타가나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 일본어를 배우는 서양인들이 원래의 일본어 단어보다도 유럽에서 수입된 단어를 배우기가 더 어렵다고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pp. 236-241
여기서 외국어 고유명사 표기의 과도한 원음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나는 원음주의를 두 가지로 구별하고 싶다. 그 첫째는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다. 이 원음주의는 한자 음역어를 한국음으로 읽는 개화기 때의 방식을 버리고, 원음에 가까운 한글 표기를 하자는 주장이다. 이 원음주의는 원칙상 옳고 자연스럽다. 우리가 덴마크를 丁抹이라고 쓰거나 ‘정말’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워싱턴을 華盛頓이라고 쓰거나 ‘화성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이런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 안에는 이와는 개념이 다른 원음주의가 있다. 이 두 번째 원음주의는 외국의 고유명사를 원음대로 표기하면서 한글이 허용하는 한 원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하자는 주장이다. 이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나는 ‘과도한 원음주의’ 또는 ‘근본주의적 원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무시하고 원음주의를 고집하는 대표적 매체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일 것이다. 이 잡지에서 프랑스의 수도는 ‘빠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는 ‘프루스뜨’다. 프랑스어의 무성 파열음은 영어에서와 달리 무기음이므로 ‘파리’가 아니고 ‘빠리’이며, 그 무성 파열음이 R소리 앞에서는 유기성을 회복하므로 ‘쁘루스뜨’가 아니라 ‘프루스뜨’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 원음주의자들은 프랑스어 첫걸음을 한국인들에게 걸리느라 바빠서, 프랑스어에서 Paris의 p와 Proust의 p가 동일한 음소라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빠리’의 첫소리와 ‘프루스뜨’의 첫소리를 구별하는 원칙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려면 spy는 ‘스파이’가 아니라 ‘스빠이’가 되고, style은 ‘스타일’이 아니라 ‘스따일’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비는 아직까지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속생각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창비에서는 여전히 ‘스파이’고 ‘스타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
가령 그것(과도한 원음주의, 편집자 주)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자.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그 원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모든 외국어의 음성학과 음운론에 통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어떤 위대한 학술단체에도 불가능한 일이다.
(...)
가령 프랑스어 이름만 해도 누구나 다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대로라면 ‘알튀세르’라고 표기할 Althusser를 창비는 여전히 ‘알뛰쎄’라고 표기한다. ‘튀’를 ‘뛰’로 표기한 것이나 ‘세’를 ‘쎄’로 표기한 것은 예의 원음주의 때문이고, ‘르’를 잘라먹은 것은 이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부를때 프랑스인들은 마지막 r을 발음한다는 사실이 창비의 편집자들에게는 알려져 있기 않기 때문이다.
(...)
지난해 월드컵 축구경기를 계기로 포르투갈어 고유명사 표기에 일고 있는 개신 바람도 나는 우려스럽다. 예전같으면 ‘로날도’라고 표기했을 어느 축구선수 이름이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호나우두’로 둔갑했다. 표기방식이 바뀐 데에는 아마 어느 ‘위대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참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가 한 일은 그렇지않아도 혼란스러운 외래어 표기에 쓰레기 한 무더기를 더 던져놓은 것 뿐이다.
(...)
이 용감한 포르투갈어 ‘전문가’의 선창에 힘을 얻어 <실낙원>의 저자를 ‘밀턴’이 아니라 ‘미으턴’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영어 전문가가 머지않아 나올지도 모른다. 또 분명히 어느 프랑스어 전문가가 그 뒤를 이어서 예술과 패션의 도시 빠히(파리)에 대해서, 그리고 미떼항(미테랑)과 호까흐(로카르)와 시하끄(시라크) 같은 정치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학술회의’는 처음의 그 포르투갈어 ‘전문가’가 호나우두의 조국은 ‘브라질’이 아니라 ‘브라지우’라고 외치며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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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성엽 2011.10.09 13:39

    아는 형이 그러는데 호나우두라던지 외국이름들 바뀐거는 포르투갈어 전문가가 아니라 어떤 광적인 해외축구팬이 신문사에 지속적으로 항의해서 바뀌었다던데 ㅋㅋ

    • addr | edit/del BlogIcon 어웅 2011.10.10 03:17 신고

      본문을 다시 보면 알수 있듯이 '위대한 포르투갈어 전문가' 라는 표현에는 그 사람이 정말 전문가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기보다는 '하이고~ 전문가 납셨네' 할 때의 그 전문가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