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2016.07.02 01:26 from 책/발췌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문학동네, 2015


이 책을 살거라고 했을때 지인은 "그걸 네가 굳이 살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겠지만 매상 올려주고 책꽂이에 전시하려고 산다"고 했다. "그게 아이돌 팬이 음반사는거랑 뭐가 다름?ㅋ" 그러네. 별로 다른게 없네. 뭐 아무튼 요즘 무거운 책 읽을 기운이 안나서 샀다.

몇몇 부분은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거나 지인과 실제로 있었던 대화였어서, 아 내가 굳이 안움직여도 이런 글이 있구나 싶은 느낌을 주었다. 다만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뒤로 갈수록 좀 부실하다는 느낌이.... 애초에 글 자체가 하나의 테마를 쥐고 쓴 글이라기보단 단상 조각글의 모음집이라 그런지. 



pp.23-24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대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라도 해본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pp.62-64

가장 두려운 것은 지나치게 빠른 평균수명 연장이다. 생물학적 수명과 사회학적 수명이 불일치하는 대책없는 고령화시대를 맞아 미래의 언젠가 무기력하게 방구석에서 종일 사극 재방송만 반복해서 보며 식구들에게 잔소리만 하게 되기 전에, 기력 있을때 주변정리하고 마지막 날까지 지구의 오지들을 걷는 여행을 떠나 길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계곡으로 떠나는 코끼리처럼. 이 얘기를 비장하게 했더니 마눌님이 가려면 혼자 가라고 그러시더라.

상상의 날개를 더 펴보자. 최후의 오지 여행을 하며 유서처럼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는데 이게 또 어떻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중계방송 보듯 찾아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기사화되더니 팬덤 형성. 응원의 메시지에, 따라 걷는 순례자들이 속출하며 일이 커진다. 어느새 그런 관심에 중독되어 신경안쓴척 실제로는 엄청 신경쓴 사진과 감동적인 한마디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세상의 반응을 즐기기에 이른 노인이 삶에 대한 의욕이 과다 충전된 나머지 '고독의 끝에서 생의 의지를 발견하다'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하며 도시로 복귀. 그동안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여 돈도 벌고 멘토 행세하다가 선생님 선생님 하며 따르는 미모 여대생과 눈이 맞아 이태리 멋쟁이 노인 흉내를 내며 스키니진 입고 스카프 두르고 데이트 다니다가 민족정론 디스패치에 대서특필. '늙으면 죽어야지' '지랄도 풍년'이라는 어제의 팬들의 댓글 러시속에 이혼당하고 무일푼으로 전락. 그러고는 독거노인이 되어 <대장금> 재방송을 무한반복 시청하며 수명만 대책없이 연장해놓은 과학자와 의사들을 저주....


pp.153-154

좋은 단편을 찾아 읽는 것은 쇠약해진 '문학 근육' 단련에 좋은 듯하다. 문학적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법관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 심리학이든 다른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범주화할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해서 보여준다. 문학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게 인간의 개별성, 예외성, 비합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 후자에 대한 이해 내지 상상력 없이 이루어지는 재판은 침대 길이에 맞춰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할 수 있다.


pp.251-252

(전략) 전통적으로 이 나라들과 대비되는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해왔고 개발독재 시대에 압축성장을 이룩한 경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세대가 아직도 많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른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식 개인주의는 우리 전통과 맞지 않는다, 나라마다 맞는 문화가 따로있다, 서양이 오히려 동양의 지혜를 배우려 한다는 등의 입장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이런 논리가 등장한다.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분별한 자유를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나라가 잘살아야 개인도 잘사는 거다, 국익을 침해하고 국론 분열을 낳는 표현의 자유는 규제되어야한다, 옛날이 좋았다... (...) 현재 우리 사회의 근본 사회계약인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토대로 현대적 복지국가 원리를 조화시키고 있음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는 언제든 이런 시대착오적인 논리가 등장할 위험이 있다.


pp.268-269

감히 가정하는 것조차 죄스럽고 조심스러워서 망설여지는 이야기지만, 세월호 사고 초기에 선장이나 해경 현장 지휘자가 모든 승객에게 당장 구명조끼 입고 바다로 뛰어들라고 명령했다면 어땠을까. 분명히 많은 생명을 구할수 있었겠지만 그 경우에도 일부의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 우리 사회가 최선의 결단을 했다며 격려해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할수 있을까. 너무 성급한 조치였다, 구조선과 더 유기적으로 협조했어야 한다, 구명정을 차례로 내렸어야 한다 같은 비난이 난무하지는 않았을까.

우리사회는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물론 이런 가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자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런 문화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책임자를 결정장애와 도피심리로 몰어넣는 측면이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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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일각에서 꾸준히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해왔고 이 때문에 한자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찬반론이 있었는데, 현재는 철회되었지만 작년 한때 교육부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안을 검토한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이 방침은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가독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한자와 한글이 섞여있는 텍스트는 한글로만 되어있는 텍스트에 비해 읽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이는 학습자의 학습의욕을 저하시킬 개연성이 있다. 어느 정도 독해속도가 형성된 성인도 법학 관련 서적 등 한자가 섞인 텍스트를 읽으면 급격하게 읽는 속도가 떨어지게 되는데, 초등학생에게 이런 국어교과서를 읽게 한다는 것은 마치 정철의 <관동별곡>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할 것이다. 


  두 번째로 학생의 학습부담을 과중시키는 비교육적인 처사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경우 한자를 혼용해서 쓰는 사회이므로 원활한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2천자 가량의 상용한자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학습부담을 감안하여 어린이들이 접하는 교과서나 잡지 등의 매체는 소리나는 대로 읽는 히라가나로만 쓰여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와 반대로 한글 전용 사회여서 성인들은 한글을 전용하면서도, 막 학습을 시작하는 단계인 초등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에게 한자를 병기한 문장으로 학습하게 한다면, 이런 정책은 비교육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의 두 근거는 한자병기라는 구체적 방법에서 비롯되는 문제점과 비판점이다. 일단 교육부는 현재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는 방침에 대해서는 철회하고, 학습자에게 한자를 친숙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 검토중인 상황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한자교육 강화 주장이 나오는 것에는 "한자를 아는 것이 적어도 한국어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자교육이 강화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한자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의 판단으로 귀결된다.




  과거 한문/한자의 구분없이 필수교육화 해야한다고 필요성을 강조했던 질낮은 주장들과 달리, 최근 추진되는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의 한자 병기와 같은 한자교육 문제를 다룬 주장은 ‘한국어 하에서의 한자’로 범위를 한정하여 한자교육을 국어교육의 범위에 포함시키겠다는 의도로써 한층 진일보한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자의 모양과 뜻을 아는 것이 한국어능력/언어능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지, 관계가 있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우선순위에 놓여야 하는 것인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한자와 한국어의 관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어휘능력과 그 응용능력에 있다. 흔히 나오는 한국어 어휘의 70%가 한자어이고,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한자의 뜻을 앎으로써 생소한 한자어에 대한 이해가 용이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한국어 어휘 중 한자어라고 지칭되는 것의 대부분은 서구 근대의 개념어를 번역하는데 쓰인 것들이다. 이런 단어들의 뜻은 개별 한자의 뜻을 안다고 해서 이해도가 높아지지 않는다. 수학, 생물학과 같은 단순한 경우에는 수(數)나 생물(生物)의 뜻을 안다면 그 파악이 한층 수월하겠지만, 이정도의 단순한 규칙은 현행 수준의 한국어교육으로도 대다수가 알 수 있다. 추상적(抽象的), 구체적(具體的)과 같은 단어 또한 한자를 알게 한다고 그 단어의 이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한글로 자주 쓰는 단어이기 때문에 학습자들이 충분히 그 뜻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회(社會), 자연(自然), 자유(自由)와 같은 경우에는 한자의 뜻 탐구에 함몰되면 오히려 바른 이해를 해치게 된다. 이들은 각각 society, nature, liberty의 번역어로 선택된 것들인데 모일 사, 모일 회, 스스로 자, 그러할 연 등의 한자를 안다고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자연이란 단어는 nature의 번역어로 선택되기 전부터 도가에서 사용된 개념이었는데 한자의 뜻으로 유추하여 nature의 번역어 자연을 혼동해서 이해하면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근대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며[각주:1], 이런 문제는 오히려 한자에서 벗어나 영어에 친숙해진 지금 세대는 빠지지 않는 함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앞에서 언급한 한자를 통한 어휘 응용방법이 해당되지 않는 단어들이 오히려 학습자의 언어능력이나 지적세계를 구성하는 주요한 어휘라는 것이 한자교육 강화론이 갖는 맹점이다. 즉 한자를 아는 것이 도움만 되는 것은 아니고 방해가 될 수 있으며, 한자교육 강화론에서 주장하는 어휘습득에 도움이 되는 응용방법은 모든 단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선택적으로 기능하기에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고, 그 해당하는 단어의 범위가 지적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영역이 아닌 부수적인 영역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한국어 능력을 넘어선 국민교육 차원의 문제이다. 의무교육 차원에서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느냐 선택 혹은 교양과목으로 지정하느냐의 차이는 그 영역의 효용성과 효율성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분명 한자를 아는 것이 반강제적으로 요구되는 영역은 존재한다. 불문학을 전공하는 자에게 불어능력이 필요하듯이 국문학, 국사학, 중문학, 한문학 등의 학습을 위해서는 한자능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로 한자를 전 국민에게 필수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세상에 배워서 나쁠 학문은 없다. 그러므로 한자를 일반교육에 필수로 넣기 위해서는 단순히 배워서 좋다고 해서는 곤란하고, 일반인 학습자를 기준으로 해당 과목의 학습에 투입될 시간과 노력, 그 효용과 효율을 따져야 함이 당연하다. 단순히 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의무교육 편입의 필요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내 생각엔 한자의 효용에 있어 필수적인 분야는 어휘를 가지고 조합하며 놀 수준이 되는 고도의 한국어능력을 갖춘, 한국어 문학을 다루는 이들만이 해당될 뿐이고, 각종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적 지식을 얻는 데에 필요한 것은 한자보다는 영어이다. 심지어는 한자교육 강화의 주된 근거로 제시되는 한자어조차도, 개별 한자의 뜻을 탐구하는 것보다 그 단어에 대응하는 외국어 단어를 대응시키고 그 단어의 사용례를 확인하는 방법이 적절한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서구에서 만들어진 단어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일반인에게 있어 한자는 선택적 교양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 효율성에 있어서 타당한 귀결일 것이다.


  한자는 다른 외국어에 비해서는 한국어와 맺는 뿌리가 깊고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중요성은 독보적으로 특별한 게 아니고 위상은 과대평가되었다.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그 어원에 해당되는 라틴어 전통의 규칙을 아는 것은 하나의 응용방법이나 배경지식의 확장방법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영어를 익히는 데 있어 필수 과정일 필요는 없듯이, 한국어에서 한자가 차지하는 위상도 이와 같다 할 것이다. 특히 (일본식) 한자어가 근대 서구 학문을 수입하면서 번역의 도구로서 기능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대로 한자를 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반인의 개념어 이해는 해당 개념어를 구성하는 한자에 기댄 어휘능력이 아니라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파악하는 본질적인 논리력, 추론능력에 우선순위가 있어야 하고 전공자 이상이라면 더더욱 번역의 도구인 한자보다는 개념의 발상지인 유럽 언어에서 이해를 구해야 할 것이다. 


  다만 완전히 한자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므로 한자 학습의 흥미를 제공하는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시험평가요소에서 제외하고 학습자의 참고를 위해 일반사회 과목에서 사회과부도로 지도책을 제공하듯이 국어과목의 일부로 별책이나 부록 정도로 수록하여 어휘 응용의 흥미를 유도하는 것은 검토할 만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한자는 개인의 필요에 의해 학습되는, 제2외국어와 같은 교양과목의 영역에 있어야 함이 마땅하다.



  1. 각종 서구 개념어들의 번역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해프닝과 태생적 문제점을 다룬 책으로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이 있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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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과거 수준은 항상 과대평가되었으며, 우리의 문제개선과 변화 속도는 항상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68738_19482.html "1997년"에 보도된 기사다. 기사의 마무리를 읽어보시길. 이게 20년 전 한국의 모습이다. 


흑산도에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서 염전노예에 이어 또 화제가 되고있다. 신안드레아스 드립 등 해당 지역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오고, 지역드립 치지 말라는 얘기도 반대편에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특수성과 전근대에 머무른 정체현상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성급한 일반화라는 소리도 못하겠다.


섬이 그렇다. 친구가 친척이고 친척이 처가가 된다. 내또래 춘천 진주 원주 순천 등 25만-30만 되는 중소도시에서 살아온(나름 도에서 상위 위계에 속하는 도시인데도) 자들이 상경해서 만나서 서울이 좋은 점에 대해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거긴 두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라 답답하다'이다. 중소도시도 그러한데 군면 단위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 섬을 끼얹으면?


밀양에서 일어난 사건 피해자는 밀양의 지역주민들에게 지역 이미지를 떨어뜨렸다고 온갖 욕을 먹었고 그들은 매장시도도 했다. 그것도 2004년 일이다. 밀양은 KTX도 다니는 동네다. 도가니의 배경이 된 광주의 일도 그렇고, 결국 일반화를 하려면 지방 전체를 일반화해야할 것이다.


한편 서울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면 지역드립이 나왓을까? 란 반문이 있다. 나름 일리가 없는건 아니다. 서울이 그랬으면 지역드립보단 헬조선 드립이 나왔겠지. 그런데 사건이 있고선 조직적 은폐가 적극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이 굉장히 우발적이거나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수준에서 약간 더 나아간게 아닌가 의심될수 있는 경우라면 그 지역의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해도 할말없다.


그럼 서울이나 대도시는 그런 사건이 없었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과거에. 산업화 시대에 서울로 수도권으로 떠난 이들은 그들의 과거를 잊고, 그들의 자녀가 모르게 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그들은 헬조선의 현재를 구성하는 서울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간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지. 미개하다고 난리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 왜 지금 서울은 이런데 지방은 이러냐는 우문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거기서 거기였던 시절이었다. 30년 40년간 한쪽은 몰빵의 기운으로 앞으로 내달려 세계적인 세계도시가 된 것이고, 한쪽은 계속 정체되었다. 수백년간 태생이 문명이었고 태생이 미개한 것이 아니다. 지역간 인식문화의 차이가 가시적으로 보이는게 100년은 된거라면 모르겠는데 고작 한세대만에 빠르게 근대화하면서 벌어진 차이로 나타난 것을, 그 변화와 차이의 주역이면서도 자랑스럽게 잊은 자들의 자녀들이 준엄하게 성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수십년간 변하지 않은 것, 그들의 책임 맞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터전도 바로 그수준에서 변한 곳이다. 그리고 그 변함의 공이 오롯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역의 앞세대가 태생적으로 잘나서인 것도 아니다. 


나도 마음같아서는 저기 다 소개령 내리고 육지로 이주시켜 찢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들이 가지고 있을 텃세와 같은 사회적 자본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고양시 행신동 옆에 능곡 화전이라고 있다. 행신동이 1세대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부터 산 여기 사람들, 생각하는거나 말하는거 보면 무안 사람들이랑 다를바가 없지만, 그런 시골스러움이 잘 감춰진 형태로 살고 있다. 또 신안 출생이지만 육지에 터를 잡은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개발이라는게 그렇고, 섬의 특수성이라는게 그렇다.


그동네가 문제인것 아니냐는 얘기에 전라도 욕하는 걸로 발전할 가능성을 우려해 일반화하지 말것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지만 난 그동네의 문제 맞다고 생각한다. 내가 들은게 있고 본게 있다. 그사람들이 어떻게 결혼했고 누가 누구와 무슨 관계인지 같은 구조들. 네가 뭘 아냐고 물으면 아버지 고향을 대겠다. 그리고 섬의 문제를 넘어 더 나아가면 정체된 지방의 문제라고도 생각한다. 그럼 또 니가 목포사람이니 경상도 밀양을 끌어들여 물타기 하는게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면 난 어머니 고향을 대겠다.


다시 돌아가, 2010년대 서울이 기준이라는게 어떤 측면에서는 가혹할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근래 들어 발견되는 일에 대한 순수한 경악이, 그 순수함이 난 껄끄럽다. 자신들의 과거를 모르는듯 아예 없었다는 듯 생각하는 대도시 기성세대의 순수함이 껄그럽고, 같은 나라이지만 이렇게나 차이가 날수 있고 차이가 있다는걸 상상조차 못하는 청년층의 순수함이 껄그럽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절대 지금 서울 수준 이대로 만족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성의 문제이고 과거를 기억하는 문제를 얘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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