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6.07.02 개인주의자 선언
  2. 2015.08.28 한글의 탄생
  3. 2015.07.03 표백
  4. 2015.07.01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5. 2015.07.01 비이성의 세계사
  6. 2015.06.08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7. 2015.02.25 신 없는 사회
  8. 2014.12.28 다시 독서 어워드
  9. 2014.10.20 순수의 시대
  10. 2014.09.27 인간 실격

개인주의자 선언

2016.07.02 01:26 from 책/발췌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문학동네, 2015


이 책을 살거라고 했을때 지인은 "그걸 네가 굳이 살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뭐 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없겠지만 매상 올려주고 책꽂이에 전시하려고 산다"고 했다. "그게 아이돌 팬이 음반사는거랑 뭐가 다름?ㅋ" 그러네. 별로 다른게 없네. 뭐 아무튼 요즘 무거운 책 읽을 기운이 안나서 샀다.

몇몇 부분은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거나 지인과 실제로 있었던 대화였어서, 아 내가 굳이 안움직여도 이런 글이 있구나 싶은 느낌을 주었다. 다만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뒤로 갈수록 좀 부실하다는 느낌이.... 애초에 글 자체가 하나의 테마를 쥐고 쓴 글이라기보단 단상 조각글의 모음집이라 그런지. 



pp.23-24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중고등학교 대 지루하게 배우던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이름과 함께 나오는, 지금의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룬다는 그 개인주의 말이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소리냐, 19세기 얘기를 21세기에 하고 있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앞에 '포스트' 내지 '후기'가 붙은 길고 복잡한 대안을 얘기하는 이들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은 이거다. 도대체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이전에 구자유주의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 사회일까? 자본주의 후의 대안을 모색하기 전에 제대로 된 자본주의라도 해본적이 있나? 근대적 의미의 개인을 존중해본 경험 없이 탈근대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 아닐까?


pp.62-64

가장 두려운 것은 지나치게 빠른 평균수명 연장이다. 생물학적 수명과 사회학적 수명이 불일치하는 대책없는 고령화시대를 맞아 미래의 언젠가 무기력하게 방구석에서 종일 사극 재방송만 반복해서 보며 식구들에게 잔소리만 하게 되기 전에, 기력 있을때 주변정리하고 마지막 날까지 지구의 오지들을 걷는 여행을 떠나 길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계곡으로 떠나는 코끼리처럼. 이 얘기를 비장하게 했더니 마눌님이 가려면 혼자 가라고 그러시더라.

상상의 날개를 더 펴보자. 최후의 오지 여행을 하며 유서처럼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는데 이게 또 어떻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중계방송 보듯 찾아보는 이들이 늘어나고, 기사화되더니 팬덤 형성. 응원의 메시지에, 따라 걷는 순례자들이 속출하며 일이 커진다. 어느새 그런 관심에 중독되어 신경안쓴척 실제로는 엄청 신경쓴 사진과 감동적인 한마디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세상의 반응을 즐기기에 이른 노인이 삶에 대한 의욕이 과다 충전된 나머지 '고독의 끝에서 생의 의지를 발견하다'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하며 도시로 복귀. 그동안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출간하여 돈도 벌고 멘토 행세하다가 선생님 선생님 하며 따르는 미모 여대생과 눈이 맞아 이태리 멋쟁이 노인 흉내를 내며 스키니진 입고 스카프 두르고 데이트 다니다가 민족정론 디스패치에 대서특필. '늙으면 죽어야지' '지랄도 풍년'이라는 어제의 팬들의 댓글 러시속에 이혼당하고 무일푼으로 전락. 그러고는 독거노인이 되어 <대장금> 재방송을 무한반복 시청하며 수명만 대책없이 연장해놓은 과학자와 의사들을 저주....


pp.153-154

좋은 단편을 찾아 읽는 것은 쇠약해진 '문학 근육' 단련에 좋은 듯하다. 문학적 감수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법관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 심리학이든 다른 어떤 학문이든 결국 인간의 여러 특성 중 범주화할수 있는 보편성을 추출해서 보여준다. 문학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게 인간의 개별성, 예외성, 비합리성을 체험하게 해준다. 후자에 대한 이해 내지 상상력 없이 이루어지는 재판은 침대 길이에 맞춰 인간의 신체를 절단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전락할 수 있다.


pp.251-252

(전략) 전통적으로 이 나라들과 대비되는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해왔고 개발독재 시대에 압축성장을 이룩한 경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세대가 아직도 많은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른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강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식 개인주의는 우리 전통과 맞지 않는다, 나라마다 맞는 문화가 따로있다, 서양이 오히려 동양의 지혜를 배우려 한다는 등의 입장이다. 여기서 더 나가면 이런 논리가 등장한다.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분별한 자유를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나라가 잘살아야 개인도 잘사는 거다, 국익을 침해하고 국론 분열을 낳는 표현의 자유는 규제되어야한다, 옛날이 좋았다... (...) 현재 우리 사회의 근본 사회계약인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토대로 현대적 복지국가 원리를 조화시키고 있음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는 언제든 이런 시대착오적인 논리가 등장할 위험이 있다.


pp.268-269

감히 가정하는 것조차 죄스럽고 조심스러워서 망설여지는 이야기지만, 세월호 사고 초기에 선장이나 해경 현장 지휘자가 모든 승객에게 당장 구명조끼 입고 바다로 뛰어들라고 명령했다면 어땠을까. 분명히 많은 생명을 구할수 있었겠지만 그 경우에도 일부의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은 있다.

이 경우 우리 사회가 최선의 결단을 했다며 격려해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할수 있을까. 너무 성급한 조치였다, 구조선과 더 유기적으로 협조했어야 한다, 구명정을 차례로 내렸어야 한다 같은 비난이 난무하지는 않았을까.

우리사회는 '결과책임론'이 지배하는 사회다. 물론 이런 가정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에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자들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런 문화가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책임자를 결정장애와 도피심리로 몰어넣는 측면이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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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2015.08.28 21:36 from 책/짧은 리뷰





한글의 탄생

저자
노마 히데키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1-10-09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리는 '한글'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일매일 한글에 둘러싸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돌베개, 2011



비교언어학적으로 한글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분석하고, 한글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과 당시 문헌을 통해 고안자들이 어떠한 고민을 했는지, 그 고민을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밝혀낸다. 미술을 하던 이력이 있는 저자답게 딱딱하게 언어학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느낌과 질감까지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의 원문인 일본어가 정말 유려하다고 하던데, 능력이 된다면 원판인 일본어판도 구해보고 싶다. 언어학적인 지식은 없지만 대강 무슨 소리인가는 알아먹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국문법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했고 일본어와의 비교를 통한 서술도 재미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별 생각없이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아니 한글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싶다. 거기에 최만리 등의 반대론에 대해서도 단순히 정치적/민족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글자와 글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전제로 한 '글쓰기 세계'의 지적 차원에서 일리있음을 밝혔다. 세종이 맞선 것은 당대 중국과 대신들이 아닌 동아시아의 지성의 역사 그 자체였다고 선언하고 새로 만든 글자로 글쓰기를 <용비어천가> 등으로 실현해냄을 보여주는 클라이막스에서는 저자의 묘한 흥분과 감동까지 전해진다.


미술 작가로서 활동하다가 한국어를 독학(!)하고 나이 서른에 다시 학부생으로 들어가 한국어학 전공자가 된 저자의 뜨거운 이력과 한글에 담긴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멋진 책이다.


+) 자음 소리와 모음 소리를 구분하는 예시에서 '노마'와 함께 사진으로 한국의 노마캔디가 같이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방금 저자의 이름이 노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이 이렇게 재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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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2015.07.03 18:51 from 책/짧은 리뷰



표백

저자
장강명 지음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 2011-07-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소설은 파격인가, 도발인가, 아니면 고발인가‘한국 문학뿐 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표백>, 장강명, 2011, 한겨레출판 


"거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로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자주 인용된 글이 실려있는 책이다. 이 대목을 보고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이거나 자신의 진심을 소재삼은 허구의 에피소드중 하나인줄 알았다. 근데 저 부분이 독립적인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닌 그저 흐르는 한 장면으로 쓰인 장편소설이었다. 


내가 최근에 이 책과 작가에 관심을 드러냈을때 (서로 공통분모가 없는거나 다름없는)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돌아온 질문이 있다. "혹시 친척 아니에요?" (이 책의 저자와 내가 이름이 비슷하다) 같이 30대를 향해 달리는 판에 뭔 시덥잖은 저질개그냐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책알못이었다. 그런 추측은 이 책을 충분히 잘 읽고 나를 충분히 잘 관찰했던 사람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추측이었다. 죄송합니다. 


97% 지점에서야 등장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마치는 다소 허무하고 갑작스런 마무리. 작가 본인이 20대가 아니어서 조심스러운 것인지,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이전에 다 있었던 걸 의도한 것인지도. 어떤 평론가는 이 책을 평하며 부조리함에 맞서는 카뮈의 문학을 소환했다. 내가 좋아하는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비하면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 담긴 내용이 너무나도 빈약하다. 이 빈약함은 이 소설의 작은 그릇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작중 묘사된 세상의 부조리함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한국문학을 안 좋아한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문학을 묻는다면 '나쓰메 소세키를 번역한 문학'이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국어로 된 문장이 번역된 문장보다도 호소력과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아니 읽기조차 버겁다면 저자의 국적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기에. 그래서 일부러 한국문학을 피했다. 개중에는 똥 모양이지만 깊은 된장 맛을 내는 것도 있어! 라고 한다고 다 찍어 먹어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한국소설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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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저자
다니엘 튜더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3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불가능의 기적을 이룬 나라 아직도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하는 나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원제 : Korea, The Impossible Country), 다니엘 튜더 지음, 노정태 옮김, 2013, 문학동네



평점을 후하게 준 느낌인데,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효용보다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는 외국인에게 주는 효용이 큰 책이라는 점을 감안했다. 한국인이 한국을 소개하는 것보다 이 책을 읽히고 나서 얘기를 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몇가지 문장만으로도 확연하다.



한국은 제대로 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해본 적이 없다.


한국인의 정은 강력한 집단주의와 관계 있다.


교회는 지금까지 사회적인 삶에서 배제되었던 중년 여성에게 소속감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여성 인력을 대놓고 내다 버리는 한국기업 덕분에 고급 여성 인력만 전략적으로 데려가는 외국계 기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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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성의 세계사

저자
정찬일 지음
출판사
양철북 | 2015-05-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사회가 위태로울 때 마녀사냥은 시작된다 - 집단 광기에 휩쓸린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비이성의 세계사, 정찬일, 2015, 양철북



비이성의 광기에 휘말린 사건 10개를 다루고 있다.

대단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 정도만 알고 있는 나같은 이에겐 

사건의 주요 흐름과 전환점에서의 디테일만으로도 쓸모와 재미가 있었던 책.



1. 소크라테스 재판

- 사실상 자살을 택한 것이었다.


2.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인 박해

- 네로에 대한 이미지/행동이 평소 알려졌던 거랑은 좀 다른데?


3. 병자호란과 환향녀

- 현재 한국의 문제와 별 다를바가 없다.


4. 중세 마녀사냥

- 어떤 식으로 마녀로 몰아갔는가


5. 드레퓌스 사건

- 가장 현대적인 형태의 마녀사냥이 아닌가


6.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 넷상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은 강간 방화 민족이라고 하는 개소리의 연원이 뭔지 알겠다


7. 매카시즘

- 매카시즘 자체보다 반공 매카시즘을 다루고 나서 홍위병과 킬링필드라는 공산주의에서 나타난 참사를 다룬 배치가 마음에 듬 


8. 홍위병과 문화대혁명

- 정말 끔찍하다


9. 캄보디아 킬링필드

- 절대 선악은 없다


10. 르완다 대학살

- 이부분은 정말 아는게 없었는데 나중에라도 다시 읽어봐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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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저자
정관용 지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 2009-11-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양 극단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중재자로 살아온 정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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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 정관용 지음, 2009, 위즈덤하우스



p.15


(....)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자아갈등'이 아닐까 한다. 명백한 사실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서로 다르게 알고 있다든가, 서로 간의 가치관이 달라서 오는 갈등은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든가, 서로 간에 일정한 양보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지만, 그조차도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아갈등, 즉 자존심의 싸움이 아니던가. 나는 그것이 결국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내가 많이 쓰긴 하지만 학문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에 머물고 만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과 자신의 진영만을 만족시키는 거꾸로의 일방적 소통일 뿐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에 대한 적대감으로까지 연결된다면 토론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손석희 당시 성신여대 교수의 추천사 中




pp. 130-132


소설가 김훈 선생은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의 언어가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기 때문에 언어가 소통이 아니라 단절로 이르게 된다. 이것은 지배적 언론이나 담론들이 당파성에 매몰돼 그것을 정의, 신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언어의 모습은 돌처럼 굳어지고 완강해 무기를 닮아가고 있다." 또 "우리 사회, 우리 젊은이들은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정서적, 이념적으로 인식한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사실일 아니라 '내편이냐 아니냐', '내게 유리하냐 아니냐'로 인식한다"라고도 했다.


(...)


김훈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위에 정의를 세울 수는 있어도 정의 위에 사실을 세울 도리는 없다. 나는 신념이 가득 찬 자들보다는 의심이 가득 찬자들을 신뢰한다."





pp. 136-138


우리 국민들에게 "당신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합니까, 진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은 아래 <그림1>과 같은 정상분포곡선을 그린다. 소위 단봉낙타형이다.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고, 보수, 진보의 양 극단으로 갈수록 소수가 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찬반이 대립되는 구체적 현실 쟁점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를 물으면 <그림2>와 같은 응답이 나온다. 중간적 입장보다는 보수, 진보 양쪽으로 치우친 입장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소위 쌍봉낙타형을 나타낸다.


자기 스스로 중도적 성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구체적 현실 쟁점에 대해서는 양쪽으로 치우친 입장을 갖는 현상, 이것을 김호기 교수는 이중성이라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단봉낙타형을 나타내는 주관적 이념 성향이 일종의 착시현상일 수 있다고 했다. 정말로 착시현상인지 아닌지는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어쨌든 이중적 이념구도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국민 여론의 양극화 현상은 분명히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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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2015.02.25 09:05 from 책/짧은 리뷰


신 없는 사회,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마음산책, 2012




신없는 사회

저자
필 주커먼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2-04-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신 없는 사회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류학적 민족지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술술 읽히기도 하면서, 여러가지 사례들을 참고하기에는 괜찮은 책이었다.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대부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덴마크인 중 82퍼센트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다윈 이론의 증거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는 서구 세계에서 진화론을 믿는 인구 비율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숫자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부분의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성경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악이나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1년간의 연구에서 이 의문을 반복적으로 파고 들었다"(p.26)



본인을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규정하는 저자는 열성적인 기독교적 메시지가 가득한 미국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 미국 사회학자에게 있어서 1년여간의 덴마크/스웨덴 생활은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선사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덴마크, 스웨덴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자.

- 동정녀, 부활에 대한 질문 -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 교회를 정기적으로 다니는가 - 그렇지 않다. 하지만 교회세를 낸다. 견진성사를 받고 교회에서 결혼을 한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종 취급을 받는다. 

- 종교적인 것에 대해 백지상태. 평소에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그런 질문은 성적인 것보다 더 사적이고 개인적인 질문으로 취급받는다.

- 교회도 안가고 신도 믿지 않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지혜의 보고로서 읽을 가치가 있으며, 기독교인의 의미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예의바른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부분을 문화적 종교라고 명명하며 그 특징을 세가지 정도로 요약했다. 

1. 교회라는 건축물과의 관계 : 긍정적인 건물이다. 공동체의 기념물이자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된다. 교회에 가진 않아도 교회 건물을 좋아하며, 그곳에서 결혼하기를 바란다.

2. 성서와의 관계 : 성서는 본질적으로 신성하지 않다. 그러나 그 책은 좋은 책이며, 고대로부터 내려온 품위있는 도덕과 가치관의 저장고이자 지혜와 통찰력으로 가득찬 중요한 이야기들을 모은 훌륭한 책, 역사서로 생각한다.

3. 정체성의 문제 : 대부분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무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무신론자는 부정적이고 전투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한편 한국은 통계적으로 봤을때 미국보다는 덴마크/스웨덴에 가까운 세속적인 사회에 가까운 결과다. 저자도 지속적으로 일본과 한국을 종교색이 옅은 세속적인 속성을 공유하는 나라들의 예로 지목하고 있다. 처음엔 이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판단이 크게 봤을때는 맞는것 같다. 적어도 일부 개신교인들 외에는 미국처럼 공개석상에서 신의 은총, 저주 운운하지 않으며 정치문제보다도 종교문제에 대한 대화를 더 꺼리고 있다. 번역자 후기를 보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덴마크보다도 미국의 현실이 더 인상깊지 않을까 라는 촌평을 달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덴마크에서 미국을 1년 경험한, 저자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한 모르텐의 이야기로 책을 끝맺는다.


덴마크에서의 인터뷰(2005) : 하느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더 큰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어릴적엔 기도도 했엇고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그게 뇌의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든다.


미국에서의 인터뷰(2007) : 종교적인 믿음을 개인적으로 간직하지 않고 자기 신앙심을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놀랍다. 자동차 범퍼에, TV와 라디오에 노골적으로 나오는 메시지들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화당뿐 아니라 민주당 정치인들도 문제가 생겼을때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식으로 답변하는 건 충격적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난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었지만, 덴마크식 기독교인이었지. 성경에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주 많아. 그래도 나는 하느님이 저 위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규칙도 만들려고 애쓴다고 들었어. (...) 그런데 여기 와서 사람들이 전부 노골적으로 나서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동정녀에게서 났다고 말하는 걸 본거야. 그런걸 죽 보며 내린 결론이, 내가 기독교인이 되려면 이런걸 다 믿어야 하는구나 였지. (...) 내가 믿어야 하는 주장들 중 겨우 10퍼센트 밖에 믿을수 없다면 나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생각할수 없잖아. (...) 그래서 이제는 귀국을 앞두고 적어도 불가지론자가 됐다고 말할수는 있을 것 같아. 어쩌면 무신론자가 된 건지도 모르지만 (웃음)"


"덴마크에서 누군가가 미국의 종교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거야. 당신은 내 말을 안 믿겠지만 미국 사회는 정치며 언론 매체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며 모든 것의 바탕에, 모든 사람이 아주 헌신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그러니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문장을 말할 때마다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말을 집어넣지 않으면, 공직에 앉을 수도, 대통령이 될 수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 덴마크인들은 미국이 우리한테 전쟁을 같이 나가자고 권유하거나 아니면 무엇이 됐든 함께 일을 하자고 권유할때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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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서 어워드

2014.12.28 22:09 from

2011년 말에 독서 어워드 결산을 했었고, 벌써 3년이 지났다. 2012년에는 입대하고 훈련받고 논답시고 안했고 2013년에는 왜 안했는지 모르겠다. 빈약하다고 생각했나. 그래서 올초에는 독서에 속도를 좀 붙였던거 같은데 지나고 보니 12, 13년에 비해 특별히 풍요로웠던거 같지는 않다. 그래서 2012-2014 한꺼번에 결산!

1.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2010), 안병길, 동녘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공부가 아닌 교양으로서의 독서라면 결국 학자와 대중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하는 수준의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은 딱 그 지점에서 보여줄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정보와 논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 시민을 위한 '진짜 자유민주주의' 입문 교과서의 결정체.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절대 어려운 글도 아니다. 물론 평소에 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공감하기 어려울 수는 있다.

2. 순수의 시대(1920), 이디스 워튼, 송은주 옮김, 민음사
누구에게는 로맨스 소설, 누구에게는 성장 소설, 누구에게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누구에게는 문화인류학적 느낌을 줄 재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이 앞으로의 세계를 스스로 판단해 나가야할 20세에 권하는 성장 소설이라면, '순수의 시대'는 정해진 것들 안에서 골라 선택해야 하는 30세에 권하는 성장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3. 코스모스(1980), 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과학자가 이렇게나 글을 아름답게 쓸수 있구나, 그 순수한 열정에 다시금 감탄하게 되는 책. 꽤나 흥미진진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분량이 쓸데없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서술이 돋보여서 평범한 인문계 전공 소시민인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4. 고민하는 힘(2009), 강상중, 이경덕 옮김, 사계절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괜히 많이 팔린 것은 아니다. 그만큼 그런 이야기와 고민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질 문제였기 때문이니까. 고민, 청춘,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의 키워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줄곧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3년 동안 4개라는 건 좀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책 고르는 기준이 깐깐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이나 독서에 쓴 시간이 적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 외에 추천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읽은 것들은

1.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2013), 천종호, 우리학교
"안돼 못 바꿔줘 빨리 돌아가"의 주인공이 소년재판을 겪으면서 있었던 일들을 모은 책이다. 내용도 좋지만 저자 소개에 적힌 책을 내게 된 배경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20대부터 큰 꿈을 품을 필요는 없다는, 그릇을 일단 키우는게 맞다는 생각. 저자가 사법고시를 준비할때부터 청소년들을 후원하는 소년재판 전문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듯이, 나는 20대에 그런 큰 목표로부터 좀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2.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2012), 최장집, 후마니타스
2년 전 생일 선물로 받은 따끈따끈한 책. 딱히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거나 인상깊은 주장이 실린 건 아니지만 그냥 퀄리티가 보장되는 책이다.

3. 거리로 나온 넷우익(2012), 야스다 고이치, 김현욱 옮김, 후마니타스
일본의 극우 단체 재특회에 대한 이야기. 한국 사회에서 일베가 뜨면서 뒷북처럼 다시 재조명된 감이 있는데 개인적으론 재특회=일베엔 동의할 수 없지만 결핍과 상실감이 인간에게 어떤 길을 걷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큰 의미로는 생각해볼만 하다. 읽고나서 뜬금없이 난 <영웅전설5;바다의 함가>를 떠올렸거든...

4.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2013), 엄기호, 따비
공교육과 학교 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악마가 되었던 교사들이 맞닥드린 현실적 고충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정보제공으로서의 유의미함도 있지만, 저자 특성에 기인한 한계도 분명하다.

나름 신간을 많이 읽었다. 주 공급처가 대학교 도서관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옮겨간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2015년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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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서 어워드  (0)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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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2014.10.20 00:28 from 책/발췌




순수의 시대

저자
이디스 워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8-07-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오만하고 우아한 옛 뉴욕을 무대로 펼쳐지는 사랑과 회한의 이야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08.



pp.26-27

그녀가 말했다. "아,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난 죽어서 땅에 묻힌 것이 틀림없나 봐요. 이 정든 옛 고향은 천국이고."

이유는 확실히 짚이지 않았지만, 이 말은 뉴랜드 아처에게 뉴욕 사회를 불경스럽게 묘사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p.148

아처는 올렌스키 백작의 비난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품고 그녀와 헤어졌다. 아내의 과거에서 '비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은 아마도 그녀를 탈출시키면서 뭔가 자기 몫의 보상을 챙겼을 것이다.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참기 어려운 상황에서 도망쳤다. 그녀는 젊었고, 겁에 질려 있었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게 감사의 정을 느꼈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딱하게도 법과 세상은 그녀가 느낀 감사를 가증스러운 남편과 똑같은 눈으로 보았다. 아처는 책임을 맡은 이상 그녀에게 이를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틀림없이 그녀는 더 큰 관용을 기대했겠지만, 그는 순진하고 따듯한 뉴욕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자비를 바라기 어려운 곳임을 확실히 이해시켰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분명히 알려 주고, 그녀가 이를 체념하고 감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말없이 과오를 자인하여 자신을 그의 처분에 내맡김으로써 초라하나 매력적인 모습이 된 듯이, 질투와 동정이 뒤섞인 모호한 감정으로 그녀에게 끌리는 것을 느꼈다.



pp.228-229

아처는 레퍼츠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의 신성한 예식에서 얼마나 많은 결점을 찾아냈을지 궁금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때는 자기도 그런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의 일상을 지배했던 그런 소소한 문제들이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아이들 장난이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형이상학적 용어들을 놓고 중세의 신학자들이 벌이는 언쟁처럼 느껴졌다. 결혼식 직전까지 결혼 선물들을 '보여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져 분위기를 어지럽혔다. 버젓한 성인들이 이렇게 시시한 문제들을 놓고 흥분해서 소동을 벌이고, 웰랜드 부인이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기자들이 내 집을 마음껏 드나들게 하는 편이 낫겠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보여 주지 않는 쪽으로 문제가 결판난 것이 아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때는 아처도 이런 모든 문제에 확고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했고,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관습과 예절 하나하나가 온 세상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믿었다.

그는 생각했다. '우리가 그렇게 복닥거릴 동안에도 어딘가에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진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을 거야.....'




pp.354-358

그녀의 어조는 자연스럽다 못해 무심하게 들려서, 아처의 동요하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다시 한번 그녀는 단순한 대응을 통해 그가 인습을 내팽개치고 있다고 여겼던 바로 그 순간에도 어리석게 인습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당신처럼 솔직한 여자는 만나 본 적이 없어요!" 그가 외쳤다.

"아, 아니에요. 하지만 가장 까다롭지 않은 여자들 축에는 낄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웃음을 담아 대답했다.

"표현이야 좋을 대로 해요. 당신은 뭐든 있는 그대로 보는군요."

"아, 그래야만 했어요. 난 고르곤[각주:1]을 보아야만 했어요."

"흠, 그것이 당신을 눈멀게 하지는 못했소! 당신은 고르곤이 별 볼일 없는 늙은 요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고르곤은 아무도 눈멀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물을 말려 버리죠."


(....)


잠시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속삭이듯 물었다.

"실현될 거라고 믿는다니 무슨 뜻인가요?"

"당신도 알고 잇어요. 그렇지 않소?"

"당신과 내가 함께 있게 되는 당신의 꿈 말인가요?" 그녀가 갑자기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할 장소를 잘도 골랐군요."

"내 처의 브루엄[각주:2]을 타고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럼 나가서 얘기할까요? 눈을 좀 맞아도 괜찮겠소?

그녀는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나가서 걷지는 않겠어요. 전 되도록 빨리 할머니께 가야 하니까요. 그리고 내 옆에 앉아서 꿈 말고 현실을 보세요."


(....)


"그럼 당신 생각은 내가 당신의 정부가 되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당신의 아내는 될 수 없으니." 그녀가 물었다.

(...) 그녀의 질문에 그는 갑자기 허를 찔린 듯 허둥거렸다.

"내가 바라는건....., 난 어떻게든 그런 말, 그런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세계로 당신과 함께 떠나고 싶소.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 그밖의 어떤 것도 중요치 않을 그런 곳으로."

그녀는 다시 깔깔대고 웃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 당신,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나요?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있어요?"


(...)

"그래, 고르곤이 당신의 눈물을 말려 버렸군요." 그가 말했다.

"흠, 고르곤은 내 눈을 띄워 주기도 했어요. 고르곤이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는 얘기는 틀린 말이에요. 그 반대죠. (후략)"




p.412

(...)아처는 이제야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 놓았다. 이제 일족 전체가 그런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해 본적도 없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메이 아처가 단지 친구이자 사촌에게 애정을 담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접대 행사를 마련했을 뿐이라는 묵계에 따라 그의 아내 주위에 모여든 것이다.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pp.435-437

"저기, 아버지, 올렌스카 부인은 어떤 분이었나요?"

아처는 아들의 뻔뻔스러운 시선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자, 솔직히 털어놔 보세요. 아버지랑 그분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었나요?"

"아름답다고? 모르겠다. 그녀는 달랐어."

"아, 바로 그거였군요! 항상 그런식으로 사랑이 시작되는거죠. 척 보니 다르더라.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라도. 제가 패니한테 바로 그런걸 느꼈거든요."

(...)

"나의 패니였다고...?"

"그 왜,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좋을 여자 말이에요. 물론 아버진 그렇게 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람을 기절초풍시킬 아들의 말이었다.

"그러지 않았지." 아버지가 엄숙한 투로 그 말을 받았다.

"예.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요. 하지만 어머니 말씀이......"

"네 어머니 말이냐?"

"예. 돌아가시기 전날이었죠. 저만 곁에 부르셨을 때 말이에요. 기억나시죠?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청에 따라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래요."

아처는 이 이상한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그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린 네모에 멍한 눈길을 박은채로 있었다. 마침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는 내게 한번도 청한 적이 없었다."

"예, 저도 잊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렇죠? 그저 앉아서 서로를 쳐다보고 그 밑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 짐작하셨을 따름이죠. 사실 귀머거리에 벙어리들 수용소 같았달까.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보다, 부모님 세대가 서로의 은밀한 속마음을 더 많이 알고 계셨다고 생각해요. 아버지...."



pp.441-443

"아버지, 6시가 다 됐어요." 아들이 마침내 그에게 상기시켰다.

아버지는 나무 아래 빈 벤치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저기 좀 앉아야겠구나" 그가 말했다.

"왜요, 어디가 편치 않으세요?" 아들이 소리쳤다.

"아니, 말짱하다. 그저 너 혼자 올라갔으면 한다."

댈러스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씀이세요?"

"나도 모르겠다" 아처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올라가지 않으시면 백작 부인이 이해못하실 거에요."

"가렴, 애야. 뒤따라가마"

(...)

"좋아요. 아버지가 너무 구식이라 승강기를 싫어하셔서 5층까지 걸어오신다고 할게요"

아버지는 다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구식이라고 해라. 그거면 충분해"

(...)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내게는 더 현실 같지." 그는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는 짙어가는 어스름 속에서 발코니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침내 창문으로 불빛이 새어나왔고, 잠시 후 하인이 발코니로 나와 차양을 걷고 덧문을 닫았다.

그것이 마치 기다리던 신호이기라도 한 듯, 뉴랜드 아처는 천천히 일어나 호텔로 혼자 걷기 시작했다.




  1.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머리카락은 뱀이며 이를 본 사람은 돌로 변한다. [본문으로]
  2. 19세기 말-20세기 초의 4륜 마차의 한 종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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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2014.09.27 09:46 from 책/발췌



인간 실격

저자
다자이 오사무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4-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인간 사회의 위선과 잔혹성을 한 개인을 통해 거울처럼 보여준 작...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2012, 민음사


p.93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각주:1]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갖가지 말이 가슴속에서 교차했습니다만, 저는 다만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진땀 나네, 진땀"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p.99


(...) 도시락 통에 먹다 남긴 밥알 세 알. 천만 명이 하루에 세 알 씩만 남겨도 쌀 몇 섬이 없어지는 셈이 된다든가 혹은 하루에 휴지 한 장 절약하기를 ㅊ너만 명이 실천하면 얼마만큼 펄프가 절약된다는 따위의 '과학적 통계'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밥알 한 알 남길 때마다 또 코를 풀 때마다 산더미 같은 쌀과 산더미 같은 펄프를 낭비하는 듯한 착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어두운 마음을 가져야만 했는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거짓' '통계의 거짓' '수학의 거짓'이며 밥알 세 알을 정말로 모을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곱셈 또는 나눗셈 응용문제라고 쳐도 정말이지 원시적이고 저능한 테마로서 전등을 안 켠 어두운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몇 번에 한 번쯤 발을 헛디뎌서 변기 구멍 속으로 떨어질까 혹은 전차 문과 플랫폼 사이의 틈새에 승객 중 몇명이 발을 바뜨릴까 같은 확률을 계산하는 것만큼 황당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정말 있을 듯하지만 제대로 발을 걸치지 못해서 화장실 구멍에 빠져 다쳤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그런 가설을 '과학적 사실'이라 배우고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서 두려워하던 어제가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1. 단수, 복수의 복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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